기자 소개

정서윤이담초등학교

기자소개

안녕하십니까? 저는 3기에 이어 4기로 활동하고 있는 동두천이담초등학교 5학년 정서윤 기자입니다. 제 꿈은 세계를 누비며 재외 국민들과 우리나라의 외교를 책임지는 외교관입니다. 외교관의 꿈을 또 쪼개고 쪼개면은 저는 제가 외교관이 되면 어릴 때부터 왠지 좋아했던 프랑스, 주불 서기관으로 제일 처음 발령을 받아보는 것이 외교관의 꿈 중 하나입니다.저는 제 꿈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 푸른누리 기자로 활동하며 제 꿈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디딤판을 마련햅고 싶습니다.3기에서의 부족한 활동을 조금이나마 메워가기 위하여 4기에서는 좀 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문소개

통통 온갖 아이디어가 넘치는 서윤 기자의 통통 취재노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리스트

정서윤 기자 (이담초등학교 / 5학년)

추천 : 32 / 조회수 : 169
왜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킨 충무공 이순신

이순신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흔히 알고 지내던 조선시대의 명장이다. 임진왜란에서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던 장군 이순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조국을 생각하여 "나의 죽음을 적들에게 알리지 마라."라는 애국심이 담긴 말을 남겼다. 후대 사람들은 애국자이자 성웅인 이순신의 업적을 기리고 싶었던 것일까, 현재 광화문 근처에는 이순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세종대왕 동상 밑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 세종이야기와 충무공 이야기라는 전시실도 볼 수가 있다. 충무공 이야기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일대기, 업적, 창의·과학성 등이 전시되어 있다. 8월 7일 그곳을 찾았다.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한양 건천동 (현재 서울 인현동 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골목대장이라고 불리며 남달리 용감했다. 22세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1572년 8월 무과별시에 응시하였으나 말에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낙방했다. 그 후 4년이 흘러 무예를 익힌 지 10년 만에 무과에 급제했고 종 9품 육군 초급 장교로 들어가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육군에서 수군과 첫 인연을 맺은 시기는 전라좌수영 소속의 발포진 수군만호로 부임했을 때였다. 이윽고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순신 장군의 첫 해전은 옥포에서 벌어졌다. 단 2일 만에 적선 40여 척을 격파하고 5월 29일~6월 10일에 사천·당포·당항포·율포 해전에서 적선 70여 척을 격파했다. 이순신이 3차 출전한 해전은 한산도 대첩이었다. 이 역시 거대한 승리를 이루었고 4차 전투, 5차 전투, 6차 전투도 빈틈없는 승이었다. 그러던 1598년, 이순신 장군은 그날도 남해 노량에서 일본 수군과 전투를 하고 있었다. 적선 200여척을 격파한 뒤 교전 도중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임진왜란의 주인공은 이순신 장군과 또 하나의 주인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순신 장군의 손에서 탄생한, 판옥선을 기반으로 제작된 돌격선인 거북선이다. 거북선 또한 무척 유명한 배이다. 적진을 뚫고 들어가 전열을 무너뜨리는 것이 주 임무였으며 전투원이 적의 공격에 노출될 수 있는 판옥선의 약점을 보완하였고 적선에 근접하여 함포를 쓸 수 있도록 했다. 임진왜란이 조선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거북선이 임진왜란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북선에는 이순신 장군의 창의력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그것은 3가지로 첫째, 배 위에 판자를 덮고 촘촘히 쇠못을 꽂아 일본군이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둘째, 앞뒤 양옆에 총통을 설비하여 적의 공격을 사방에서 막을 수 있게 만들었다. 셋째, 노를 선체 안쪽에 배치하여 다른 배와 충돌해도 쉽게 부러지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순신이 성웅으로 불리는 것은 천재적 재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품을 소유했고,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한계에 도전하여 시대적 소명을 다하였던 거룩하리만큼 훌륭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충무공 이야기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말이다. 성웅, 사전을 찾아보면 지덕이 뛰어나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영웅이라고 쓰여 있다. 이순신은 충무공(내 몸이 위태로워도 위를 받들어 쳐들어오는 적을 물리쳐 치욕을 막는다. 즉, 무관에게 가장 영예로운 시호를 말함)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성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번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을 때 그와 라이벌 관계였던 원균이라는 사람이 이순신에게 누명을 씌우는 바람에 백의종군이 되어 사형에 처할 뻔 한 적까지 있었는데 이순신은 육군으로 가라는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작은 벼슬일 지라해도 수군으로 싸울 수 있게 해 달라며 수군과 바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이순신 장군은 카리스마 있는 지휘력과 리더십으로 불리한 조건으로 시작한 명랑해전에서 단 13척인 판옥선으로 133척의 일본 배를 무찌르는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앞으로 이 한반도 땅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이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본받았으면 하고 바란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쟁터에 나가서 싸웠던 이순신의 업적은 후대에도 길이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