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소개

엄선영회천초등학교

기자소개

우리나라와 세계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며 문화를 알리는 문화부 기자가되어 실력을 쌓고, 큐레이터를 거쳐 문화부 장관을 지내고 말년엔 명예의 문화 엠배서더가 되는 것이 저의 목표이지요. 전시장을 다니며 ‘저작품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죠.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이런 제 궁금증을 풀어갑니다. 금방이라도 요정이 날아올 것 같은 플루트의 천상소리를 3 옥타브쯤은 거뜬히 연주할 수 있죠. 태권도, 수영, 승마, 테니스 등의 여러 스포츠를 할 줄 압니다. 의정부 예술의 전당 소년소녀 합창단과 중창단에서 활동한 바 있어 성악 공부와 영어 뮤지컬 백설 공주, 미녀와 야수 등의 공연을 했으며, 대표로 한글창제기념 시낭송 대회와 제7회 양주·동두천대표로 어린이 국회에 참여하여 토론도 했죠. ‘북송문제, 다문화문제, 답사기행문 등의 기사를 써 우수기자로서 여러 기관의 어린이 기자로 활동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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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문화’라는 것을 만듭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고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공유하며 좋은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더 큰 글로벌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문화로 이어진 지구’는 그런 문화에 대해 소개합니다. 꾸밈이 없고 소소한 우리나라의 박물관과 유적지를 비롯해 해외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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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선영 기자 (회천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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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낮추고 쌀의 귀중함을 배운 봉선사 템플스테이

종교가 불교가 아닌 사람들은 사찰 체험이 좋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역사를 배움에 있어 불교의 문화를 모르고는 역사를 공부하기 어렵다. 그래서 양주·동두천 교육청 울타리 소속의 문경희 선생님은 이번 프로젝트를 템플스테이로 정하셨다.


4월 20일, 시험이 끝나자마자 봉선사 템플스테이를 가기 위해 포천 광릉수목원에 있는 봉선사로 향했다. 가는 동안 스님들과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설레기도 했지만, 다음날 새벽 4시에 기상한다는 일정표를 보고는 일찍 일어날 생각에 심란하기도 했다. 먼저 도착한 나는 절 주변을 돌고 사진을 찍으며 친구들과 선생님을 기다렸다.


기둥은 한 줄로 서있고, 그 한 줄이 바깥세상과의 경계를 알리는 절에 들어오는 대문과 같은 일주문이 보였다. ‘운악산 봉선사’로 산의 이름을 따서 일주문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일주문 앞에서 인사하듯 고개 숙여 반배로 인사를 하고 부처님 세상에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돌길과 양 옆으로 굵직하게 쭉쭉 뻗은 나무들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오리들이 있는 연못과 거대한 노장의 느티나무가 날 멈추게 했다. 이 느티나무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자를 위해 봉선사가 설립되었을 때부터 심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500년을 꿋꿋하게 버티어 온 느티나무의 생명력에 감사하며, 내가 볼 수 있게 보살펴주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목에게 반배를 했다.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 약속한 오후 5시가 되었고, 곧 울타리 친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따라 한방에 4명씩 방을 배정받고 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바지는 통이 널찍하며 길고, 조끼는 토벌구이를 한 옷 같았다. 이런 옷을 입는 기회가 드물어서인지 서로들 머쓱해하며 크게 웃었다.


우리는 곧바로 운하당에 들어갔다. ‘발우습의’ 교육을 해주실 철견 스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발우’는 절에서 사용하는 적당량의 밥을 덜어먹는 용기라는 뜻이고, ‘습의’란 용기에 대한 설명이다. 절에서는 식사를 공양이라 말하는데 그 과정이 매우 복잡했다. 큰 발우 순으로, 어시 발우(밥), 국발우, 청수발우(물), 반찬발우가 있었다. 먼저, 발우 수건 및 수젓집을 모두 개어 오른쪽에 놓은 다음, 큰 발우 순서대로 배열하고 먹을 음식과 물을 알맞은 발우에 담는다.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청수발우에 물을 부은 다음, 단무지로 깨끗이 닦아 그 물을 청수 발우에 모아 마신 후, 다시 한 번 닦아 그 물은 청수 통에 넣는다. 청수 물은 아귀들이 받아먹는데, 아귀는 식도가 바늘구멍만 해서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먹지 못하고 고통 받는다 하여 물만 버리고 남은 찌꺼기들과 단무지는 모두 뱃속에 넣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청수 물의 맛이 그다지 좋지 않아 공양하기가 쉽진 않았다. 친구들을 보니 인상을 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모두 꼴딱꼴딱 마시고 있었다. 공양을 먹을 때는 엄숙하고 밥그릇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하며, 등을 곧게 펴고 먹어야 먹고 나서도 소화가 잘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엄숙함과 조심스러움이 몸에 배어 있지 않은 나는 등도 자꾸만 구부러지고, 먹다보니 그릇소리도 나고, 친구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나오는 웃음을 참아가면서 즐겁게 발우공양을 마쳤다. 철견스님은 “발우공양을 체험하는 이유는 절의 음식예절을 배우는 것이지만 쌀의 귀중함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농부의 땀과 노력으로 만든 쌀 한 톨의 무게를 7톤으로 여겨, 농부의 수고스러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하며 버리거나 남기지 않아야 함을 깨닫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한 친구가 다 먹었는데 나가도 되냐는 질문을 하자 스님은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듯, 다른 사람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함을 배우는 것도 발우공양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발우 공양을 하는 중 범종루에서 북, 운판, 물고기모양의 목어, 종의 사물 소리가 들려왔다. 공부를 미리 해온 터라 보고 싶었지만, 우리들이 늦게 도착하여 발우공양도 늦어지고 밥 먹는 도중에는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일찍 도착한 나로서는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아쉬움을 남긴 채 약간의 휴식을 갖고 촛불예불을 했다. 겸손과 고요함을 지니며 손을 교차한다는 뜻을 가진 ‘차수’를 취하며 나는 내심 시험 성적에 대한 소망을 빌었다. 약 20분간 허리도 곧게 펴고 손도 한결같이 유지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 5분쯤은 집중이 잘 되지 않아 내 앞의 촛불이 흔들거렸다. 친구들 중엔 안절부절 못해 부스럭거리는 소리들이 들리기도 했다. 이렇게 촛불 예불을 마치고 9시에 잠자리에 들라고 하셨다. 새벽 4시 기상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빨리 자야 하겠지만, 108배를 하고 염주를 만든다는 내일의 설렘으로 잠이 오지 않아 친구들과 조잘거리기도 하고 고요함 속에 들리는 풍경 소리도 감상하다 잠이 들었다.


새벽 4시가 되어 도량을 돌며 만물의 잠을 깨운다는 주문이 들려와 고요함 속의 적막을 깨웠다. 목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몽사몽 일어나 주지스님의 설교 하에 부처님께 아침 예불을 드렸다. 스님들은 여러 가지 주문들을 외우며 절을 하셨다. 나는 스님을 따라 했다. 예불을 드리며 여전히 꿈속을 헤매듯 108배를 드렸다. 초반에는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60배쯤 올리니 땀이 나기 시작하고,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나의 기를 모아 108배를 마칠 수 있도록 정신을 차려서인지 드디어 해냈다.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나 130번 정도의 절하는 운동을 하였으니 저마다 뱃속에서 노래를 불러댔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들은 식당으로 향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아침 공양을 했다. 이번 공양은 어제와 같은 발우 공양이 아니라 모두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모두 대법당 앞에 모이라는 철견스님의 말씀과 함께, 우리들에게 모두 빗자루가 주어졌다. 절의 주변을 청소한다는 ‘운력’을 하기 위해서다. 스님께서 말하길 빗자루를 편한대로 쥐고 흙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좌우로 쓸며 땅을 고르게 해주고 낙엽 등은 구석으로 모으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하셨다. 나는 이번에 볏짚으로 만든 긴 빗자루를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다. 가정용 빗자루보다는 통쾌한 소리를 내며 땅을 고르게 하는 볏짚 빗자루가 더 편하고 먼지를 잘 모으는 듯 했다. 기회가 된다면 절을 청소하는 운력 봉사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짓궂은 아이들은 흙먼지를 세게 일으키곤 킥킥 웃어대기도 했지만 스님은 오히려 따뜻하게 "드라마에 출연할 정도로 멋진 자세"라고 칭찬해 주셨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스님의 너그러우신 반응에 친구들은 감탄한 듯 묵묵히 쓸었다. 마당위의 부채꼴 모양이 그려진 것이 예술작품 같았다. 이렇게 우리는 대법당 앞에서 입구의 느티나무까지 운력을 마치고 빗자루를 걷었다.


다음은 스님을 따라 절 안의 뒷동산을 따라갔다. 봉선사는 뒷동산에 국립수목원을 품은 곳이다. 봉천사 템플 스테이만의 특권이 있다면, 바로 울창한 소나무와 잣나무 등의 공기 좋은 산을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국립 광릉수목원으로 생태와 자연환경을 연구 관찰하기 위해 숲길을 만든 것으로 외지인은 들어갈 수 없으며 잘 정돈되어 있었다. 쭉쭉 뻗은 전나무들의 모습이 왠지 이국적으로 보였다. 나무 기둥 중 잘 생긴 나무들은 잘려나갈 차례를 기다리는 듯 빨강, 노랑, 희색 등으로 둘레를 칠해 놓은 것이 보였다. 빨강은 베어질 나무라고 하는데, 이유는 작은 나무들이 자랄 틈도 주어야 하고 영양분도 골고루 주어야 하기 때문에 너무 큰 나무들은 베어 다른 곳에 이용한다고 하신다.


처음 오르는 길은 가팔랐지만 여러 신기한 나무들을 보며 산책이 시작되었다. 뿌리가 다르지만 서로 맞닿은 채로 자란 연리근도 보고, 숲에서 중간 중간 휴식하며 바닥에 떨어진 큼지막한 솔방울을 던지며 장난도 치고, 진달래꽃의 수술을 떼어내고 먹어 보기도 하고, 가지가 벤치처럼 낮고 기이하게 뻗은 나무들을 보며 림보도 하는 등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놀았다. 가는 중간 멧돼지들이 파놓은 구덩이를 보고, 갑자기 멧돼지가 나타나는 건 아닌가하고 겁도 났다. 우리들만 있는 이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모두들 아쉬워하며 하산을 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이렇게 많은 일들을 아침에 했는데, 아직도 시간은 8시가 안되었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쪼개 쓸 수 있음을 확인하는 좋은 체험이 되었다.

다시 운하당에 모이니 갈색 조끼복장의 옷을 입고 계신 해명거사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분은 사찰문화 해설을 하러 오신 분이셨다. 우리는 절의 첫 번째 문인 일주문, 예불 시간 등을 알리는 네 가지 사물, 사찰생활과 스님에 대한 예절, 근심과 걱정을 해결해주는 해우소(절의 변소), 부처님의 탱화 등 기본적인 불교에 대한 내용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쉽게 가르쳐 주셨다.


Q. 봉선사는 무슨 뜻인가요?

A. 예종 1년(1469),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의 영혼을 봉안코자 다시 일으켜 세워 절의 이름도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라 하여 봉선사라 하였습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평생 마음 편히 살지 못했을 것이고 이를 지켜본 정희왕후는 영혼이나마 편히 쉴 수 있도록 봉선사에 정성을 다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지요.


Q. 봉선사의 부도 밭에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A. 운허스님은 춘원과는 6촌간이고 춘원이 친일변절자의 오명과 아들의 죽음으로 괴로워할 때 춘원을 불교의 세계로 인도하고 따뜻이 위로해 주었습니다. 해방 후, 운허스님은 독립운동가로 명성을 떨친 반면 춘원은 변절자의 신분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을 때 춘원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몇몇 지인들이 기념비를 세워 춘원과 봉선사와의 연을 기리고 있죠.


질문을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드리는 올바른 절을 익히는 것으로 사찰수업은 마무리 되었다.


다음은 각자 작은 상을 가지고 와서 펴고 오미자차를 마시고, 드디어 모두가 가장 기다렸던 염주 만들기 시간이 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염주 구슬, 卍(만)자가 새겨진 구슬,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만들어진 작은 구슬, 부처님의 모습이 그려진 구슬 등 여러 구슬들이 있어 우리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했다. 여러 개를 만드는 친구들도 있었고, 다른 종교를 가진 친구들은 구슬만 끼워 만들기도 하고, 거의 다 만들었을 때쯤 끈이 풀어져 한 개의 염주를 여러 번 만드는 친구들도 있었다. 만든 염주를 차고 마치 바둑이가 방울을 단 듯 흔들어 대며 기뻐했다.


토요일 초하루 법회 때문인지 사람들이 무척 많아 점심공양을 좀 서둘렀다. 큰 대접 위에 마른 가지무침, 호박곶이, 콩나물 무침, 두부조림, 깍두기의 반찬에 된장국, 그리고 무지개떡과 쑥절편이 나왔다. 친구들은 모두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너도 나도 모두 정겹게 먹었고 분위기가 한층 좋아져 기분 좋은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자신의 그릇을 설거지하고 나오니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기와지붕의 사이로 빗물이 타고 내려와 일정한 간격에 동그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대청마루에 앉아 귀가하는 회향식을 하기 위해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의 움직임들을 보며 빗방울을 감상하고 있을 때 주지스님께서 오셔서 가르쳐 주신대로 반배를 했다. 스님은 인자하신 웃음과 함께 간단한 인터뷰를 해주셨다.


Q. 봉선사에서 템플스테이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예전엔 전화도 없이 살았는데, 요즘은 초등학교 때부터 전화기를 가지고 다니다보니 조급해져 스스로 생각도 안 하고 괴로움에 빠집니다. 좋은 시대 같지만 악조건이죠. 자살하는 어린아이들이 많은데 죽음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자연과 더불어 동심으로 돌아가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며, 신경질이나 친구들 간의 싸움 이런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는 데 있습니다. 자연을 느끼고 바라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도록 일깨워 줄 책무가 있는 것이죠.


Q. 봉선사의 템플스테이의 자랑거리라면?

A. 광릉수목원 원장님의 허락으로 숲을 개방하여 절 뒷동산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명상길 걷기를 할 수 있게 되어 정신을 맑게 할 수 있다는 것과 1970년 운허스님이 복원하고 큰 법당의 현판을 한글 현판으로 쓰고 불교대중화에 기여하신 것이 자랑거리죠. 또한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선사와 함께 만들어진 조선전기 보물 제397호인 봉선사대종 역시 봉선사 템플스테이의 자랑입니다.


Q. 템플스테이를 하는데 다른 종교를 가진 친구가 절을 했다고 울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해주면 좋겠습니까?

A. 절하는 목적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오체투지’라 하여 머리, 양 무릎, 양팔을 땅에 닿도록 자신을 낮추라는 것이지요. 부처님 말씀을 따르라는 것이지 부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하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는 절을 하는 것은 아니지요.


25교구 봉선사 주지이신 정수 스님과의 대화를 끝으로 일정을 모두 끝냈다.


선생님 말씀대로 불교는 372년 소수림왕 이전부터 시작되어 문화재의 70%가 넘게 우리의 문화는 불교문화와 연관이 있다. 종교를 떠나 우리나라의 문화를 공부했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종교가 무엇이든 절에서의 하루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체험으로 스님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어서 궁금증도 풀렸고, 식사의 즐거움과 쌀의 귀함을 알았다. 또한 좀 더 부지런한 어린이가 되어 시간을 잘 쪼개 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