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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 12월 2일

문화속으로 추천 리스트 프린트

이예은 독자 (동학초등학교 / 6학년)

추천 : 11 / 조회수 :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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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작 홍사용 문학관’을 다녀와서

경기도 화성시 석우동에 있는 ‘노작 홍사용 문학관’에 11월 21일 다녀왔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과 함께 홍사용 선생님의 시비가 있고 묘소도 있다. 홍사용 문학관을 이보람 선생님의 안내로 둘러보았다.

1층 전시실을 둘러보며 한국근대시사와 홍사용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들었다.
 
1910년대 우리나라 근대시가 출발하였는데 최남선, 김억, 주요한 등의 시인이 있었다. 1920년대에는 3·1운동의 실패로 감상적 낭만주의와 시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 시기였는데 한용운, 김소월, 이상화 등의 시인이 있었고, 이 때 홍사용 선생님께서는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고 ‘토월회’와 신극 운동을 하셨다. 1930년대 순수성과 예술성을 지향하는 시기였는데 정지용, 김기림, 이상 등의 시인이 있었고, 1940년대 암흑기의 서정시가 쓰여졌는데 이육사, 백석, 윤동주 등의 시인이 있었다.
 
노작 홍사용 선생님은 경기도 용인군 농서리에서 1900년 5월 17일에 태어나셨다. 홍사용 선생님의 아버지는 용인과 화성에 많은 농토를 지녀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태어난 지 100일만에 무관학교 1기생에 합격한 아버지를 따라 홍사용 선생님은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아홉 살 때 군대가 해산되었고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17세 때에 휘문의숙에 입학하셨고 19세 때에 정백, 박종화 선생님과 ‘피는 꽃’을 펴냈다. 20세 때 3․1운동에 참가하셨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돌아와 합동 수필집 ‘청산백운’과 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쓰셨다. 1922년 1월에 ‘백조’ 창간호를 발행하였는데 ‘백조’는 3호까지 발행되고 폐간되었다.  


홍사용 선생님께서는 1923년 극단 ‘토월회’의 창립공연 빚을 갚아주면서 우리나라 신극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1924년 ‘토월회’ 3회 공연 때부터 본격적 연극활동을 하면서 재정적 지원도 하셨다. 그리고 직접 ‘회색의 꿈’을 연출하셨고 창작 희곡 ‘산유화’를 쓰셨다.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 등과 극단 ‘산유화회’를 조직하고 희곡 ‘향토심’과 번역 작품 ‘소나기’를 연출하셨다. 30세 이후부터는 미투리에 두루마리 차림으로 전국을 방랑하셨으며 1935년경에는 세검정에서 한방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하셨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썼지만 일제의 검열로 주거제한을 당하자 절필하셨다. 1947년 1월 5일 서울에서 돌아가셨는데 고향인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에 묘소가 있다.

홍사용 선생님은 문예지 ‘백조’를 창간하고 ‘토월회’와 신극 운동을 하신 것이 대표적인데 민족주의적 의식을 갖고 있는 낭만파 시인이셨다. 일제 강점기에 곧은 선비정신으로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시를 지으셨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 2층에도 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휘문의숙 동기이자 9촌인 홍호선에게 보내는 친필 편지에는 백조 발간 및 발송 후 수신 여부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고 휘문의숙 재학 당시 1등 시험지와 선생님의 작품이 담긴 한국문학전집 등 관련 자료를 볼 수 있었다.

홍사용 선생님께서는 문예동인지 <백조>를 창간하셨지만 한 권도 시집도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홍사용 선생님의 시 작품으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 ‘봄은 가더이다’, ‘해 저문 나라에’, ‘붉은 시름’, ‘푸른 언덕 가으로’, ‘통발’, ‘월병’ 등의 작품이 있다.


토월회는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인 박승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문 극단으로 근대극 운동을 펼쳤다. 홍사용 선생님은 1920년대 중반부터 토월회에 참여하였는데, 당시의 희곡들이 관념적인 주제에 남녀 간의 애정, 가정불화 등의 내용이었는데 홍사용 선생님의 작품은 민족운동을 담고 있다.
 

노작 문학상을 해마다 수상하고 있는데 고고한 선비정신의 홍사용이 남긴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뜻으로 매년 탁월한 작품을 발표한 작가를 표창하여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1회 안도현 시인, 2회 이면우 시인, 3회 문인수 시인, 4회 문태준 시인, 5회 김경미 시인, 6회 김신용 시인, 7회 이문재 시인, 8회 이영광 시인, 9회 김행숙 시인 등이 수상하셨고 올해에는 김소연 시인이 선정되셨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에는 도서관과 북카페가 있다. 이 북까페는 화성시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운영되는데 할머니들께서 일하고 계셨다. 맛있는 쿠키와 코코아를 마시며 안도현 선생님의 ‘증기기관차 미카’를 읽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을 나오다 보니 초청특강과 문예창작 강의 안내문이 보였다. 그래서 노작 홍사용 문학관은 선생님의 문학을 돌아보기만 하는 기념관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을 나와서 시비 ‘나는 왕이로소이다’, 꿈이라면?‘, ’해 저문 나라에‘, ’봄은 가더이다‘를 보았다. 시비를 보며 언덕으로 올라가니 이어진 산 속에서 낙엽이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홍사용 선생님의 묘소에는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비가 함께 있었다. 시비와 묘소를 둘러보며 홍사용 선생님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읽어 보았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처음으로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발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리었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의 지우시는 눈물이 젓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에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날 밤, 맨잿덤이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 인데요.
명이나 긴가 짧은가 보려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너 산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면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하고 쫓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은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둑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련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니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홍사용 선생님의 호 ‘노작’은 ‘이슬에 젖은 참새’라는 뜻이다.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읽으면서 이슬에 젖어 날지 못하고 수풀 사이에 숨어있는 작은 참새가 떠올랐다.


일제강점기의 눈물의 시기를 살아야 했던 노작 홍사용 선생님. 홍사용 선생님의 시를 읽으니 곧은 모습으로 살아가신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예은 독자 (동학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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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환
대륜중학교 / 1학년
2010-12-08 22:34:47
| 호의 뜻이 슬픈것 같아요. 좋은기사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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