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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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동학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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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

지난 2월 25일 푸른누리 기자단은 독립기념관 탐방을 다녀왔다. 책에서 읽었던 우리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독립기념관을 향했다. 이번 탐방은 전시관 관람과 함께 독립군 체험학교 프로그램도 참가하게 되어 3․1운동 9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독립기념관은 수많은 외침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고 전시․교육하는 곳이다. 특히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일제 강점기 동안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독립기념관은 1982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계기로 하여 1987년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개관하였는데 겨레의 집, 겨레의 탑, 7개의 전시관, 입체영상관, 독립군 체험학교 등의 많은 시설이 있다.

이번 탐방에 독립기념관 해설사 선생님께서 함께 하셨는데, 먼저 ‘불굴의 한국인상’에 대한 설명해 주셨다. ‘불굴의 한국인상’은 8명의 어른과 1명의 아이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른들은 팔도 강산, 아이는 밝은 미래를 나타내며 뒤에 새겨진 백두산은 민족의 자긍심을 나타낸다고 한다.


독립기념관 시설물들을 살펴보면, 입구의 ‘겨레의 탑’은 약 50m 정도 되는데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국가 발전과 통일 염원을 바라는 손모양이고, 두 번째는 새가 날기 위한 날개 모양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추모의 자리’는 105개의 계단, 105m에 해당하는데, 신민회 당시 일제가 회원들을 구속했을 때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그 105명을 기리기 위함이다. ‘통일염원 동상’은 무지개 다리 모양인데, 탑은 하늘을 의미하고, 종은 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종은 남과 북으로 타종이 가능하다. 조선총독부건물의 철거자재로 만든 전시공원에 조선 총독부 철탑이 낮은 땅에 전시된 것은 총독부 건물이 지하에 있다는 것으로 일제의 잔재를 무시하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제2전시관-겨레의 시련’은 개화한 이후 식민지로 전락한 1940년까지의 자료를 모아 전시한 곳이다. 전시관 입구에는 영상이 비춰지고 있었는데, 그 영상의 먹구름은 고통과 시련으로 일제강점기를 의미한다. 쇄국정책을 상징하는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세운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 고종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시작한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은 당시 유교 사상이었던 조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만행이었다. 결국 이 일 때문에 흥선대원군의 천주박해는 더 심해졌다.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더 강화하였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는데, 우리나라가 일본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3개의 항구(원산, 부산, 인천)를 개방한다는 것이었는데, 만약에 조선에 사는 일본인이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 일본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이다. 1882년에 계속된 조약으로 모든 항구가 완전히 개항 당하게 된다.


임오군란은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일어났다. 근대화로 인해 별기군이 창설되었다. 그런데 구식군대와 신식군대의 차별이 심했다. 당시 구식군인에게 급료를 지급하던 선혜청에서 13개월이나 밀린 급료 중 1개월분만을 겨와 모래가 섞인 쌀로 지급하자 군인들은 결국 폭동을 일으켰다. 군란에 도시 하층민까지 가담하면서 걷잡을 수없이 커져 청나라 군대가 진압하게 된다. 이후로 청나라 군대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내정간섭이 시작된다.

갑신개혁은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청국의 내정간섭이 강화되자 급격한 정치 변혁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하고 국가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정변을 계획한 것으로 우정국 파티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일본의 배신과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좌절되었다고 해서 3일 천하라고도 불린다. 이후 청일 양국은 텐진조약을 체결하는데, 청일 양국이 파병과 철수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 일로 제1차 청일전쟁이 발발된다.

근대화된 조선의 모습을 전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우체부와 병원 그리고 전화와 우리나라에 첫 번째로 생긴 천연당 사진관 등이 있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차였다. 전차는 한 때는 ‘악마의 차’라고 불렸는데, 당시 5살의 어린이가 전차에 치어 죽어 폭동이 일어나 2대가 불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이 있으면 특등실, 문이 없으면 2등실 이었는데 특등실은 당시 5원, 2등실은 3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쌀 80kg이 2원이었는데, 전차를 타기 위해 패가망신한 집도 있다고 한다.

동학 농민군들이 썼던 창도 보았다. 당시 동학 농민군 100명이 일본군 한 명을 죽일 수 있었다고 하는데 무기 차이가 그 이유라고 한다. 광무황제인 고종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고종황제는 명성왕후 시해사건 이후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한다. 1년 뒤,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쳤는데 자주적 국가라는 것을 알린 것이다.


을미사변과 을사늑약 체결 장면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은 모습도 전시되어 있었다. 을사늑약 체결 모형의 가장 가운데에 안중근 의사께서 쏘아 죽인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고종황제는 옥새를 찍지 않았으며 을사오적에게 아무런 권한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는데, 이 이후로 고종황제는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고 경술국치를 겪게 되었다.

‘제3전시관-나라 지키기’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올해로 100주년이라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뤼순 감옥에 수감된 후 재판 투쟁으로도 유명하지만 아직까지도 시체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이 발휘된 국채보상운동으로 당시 모인 돈만 1,300만원이라고 한다.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은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강제로 돈을 빌리게 시켜 경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돈을 모아 갚으려고 했는데,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제4전시관-겨레의 함성’에는 3․1운동에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이 "한 나라는 한 민족이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자 우리나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무황제가 승하하셨는데, 광무황제의 승하가 일제에 의한 독살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게 되어 3․1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3․1 만세 운동 당시 우리나라 국민이 2,000만 명이었는데, 이 중 200만 명이 참가했으며 이 때 전 세계 한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모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겨레의 광장에는 3․1 운동을 재현해 놓고 있었는데, 사진과 원판의 필름을 볼 수 있었다. 3․1 운동 때에 15,0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7,0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제암리 학살은 일제가 3․1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으로 총격과 함께 교회당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지르고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해설사 선생님께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자료들을 설명해 주신 뒤에, 3․1 운동 이후에 우리나라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으며 3․1 운동은 세계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입체영상관의 4D 영화 ‘도토리 훈장’은 정말 재미있었다. 시간 여행을 하게 된 한얼이가 독립군인 증조할아버지를 만나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의자가 흔들리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해서 실감이 영화 장면이 실감 나기도 했다.

독립군 체험을 위한 독립군 학교는 신흥무관학교를 모델로 해서 지은 것인데 내부에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사용했던 도구와 먹었던 음식 등 의․식․주를 중심으로 꾸며 놓았고, 교실은 예전 같은 나무 의자에 나무 책상이었다. 독립군은 나라를 되찾고자 무기를 들고 일제와 맞서 싸우던 사람들로 만주나 간도로 나가 많은 활동을 했다. 그 이유는 국내에서 벌어진 무자비한 탄압과 감시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일제를 밀어내려 했으나, 일제가 무력으로 탄압을 하자 평화적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해서 만주와 간도로 가서 독립군이 된 것이다.

‘봉오동 전투’는 간도로 들어온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해 무찌른 것으로 전투를 이끈 장군은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 장군은 원래 사냥꾼이었으나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독립군으로 활동하셨다고 한다. ‘청산리 대첩’은 무려 6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당시 독립군은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일본군보다도 사기가 높았고 매복을 이용한 전술도 많이 이용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독립군들은 교육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학교가 신흥무관학교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중국 만주 서간도에 세워졌던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신민회 간부였던 이회영과 혁신우립 이상룡․김동삼 등이 주축이 되어 설립하고 발전시켰다. 만주의 혹독한 추위와 토착 중국인들의 경계, 어려운 재정,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청산리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신흥무관학교 교관들은 흰 옷을 입고 학생들은 황갈색의 옷을 입었으며 학생들은 좀 먹은 좁쌀로 지은 밥이나 감자, 옥수수와 콩기름에 절인 콩장을 먹는 어려운 생활을 했다. 교가도 불렀고 교과서로는 역사, 지리, 인물, 풍속의 4권이 있었다. 졸업생들이 만든 신흥학우보에 안중근 의사께서 쓰신 글이 실려 있는데 이것으로 안중근 의사를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많이 존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 총을 구하기는 어려웠기에 나무를 깎아 총을 만든 목총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번 독립기념관 탐방 하루 만에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독립기념관은 민족혼을 간직한 곳이고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 운동가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올해는 3․1운동이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의 그 날을 위해 독립을 위해 독립만세를 외쳤던 분들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생각하고 기려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이 이번 탐방이 주는 교훈인 것 같다.

이예은 기자 (동학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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