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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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림 (서울고명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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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싹을 틔운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주변 정동일대는 근대와 현대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다. 정동거리를 다니다 보면 외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100년 전, 정동거리에서도 많은 외국인들을 만날 수 있을만큼 정동은 근대화라는 새로운 물결을 가장 먼저 맞이했던 곳으로 새 교육과 새 문물이 희망의 싹을 틔웠던 곳이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다른 문화에 대한 충격을 줄여주는 에어백 역할을 하였다.


근대화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 몇 군데를 소개한다. 배재학당역사 박물관에서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길, 덕수궁, 황궁우가 그곳이다.



1.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이다. ‘배재학당’이란 이름은 1886년 고종황제께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하사하였다.

2008년 7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새로이 탈바꿈된 배재학당 동관은 1916년 준공한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로,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서 교육을 실시했던 공간이자 수 많은 근대 지식인들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의 요람이다. 근대 교육을 확인 할 수 있는 소장품들과 함께 상설전시관, 기획 전시장, 체험 교실 등을 갖추고 있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배재학당의 설립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1층 상설 전시관에서는 배재학당 교실 체험과 배재의 교육, 명예의 전당과 배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것이 전시되어있다.
배재학당 교실 체험관에선 1930년대 배재학당의 교실을 재현한 공간으로 당시 사용했던 칠판과 책걸상 등을 통해 근대 교실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고, 영상물을 통해 120년 전 아펜젤러의 교육모습과 배재학당의 앞선 교육을 이해할 수 있다.

배재의 교육을 보여주고 있는 전시관에선 아펜젤러 선교사의 교육 모습과 아펜젤러 선교사의 제자들에 대해 나타내고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께선 배재학당에 다니고 싶어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배재학당 공업부와 인쇄소에서 일하게 하여 모든 이에게 공부할 기회를 제공해 주셨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를 사랑하셨던 아펜젤러 선교사께선 사고로 돌아가시기 직전 "나는 웨스턴 민스턴 사원보다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설사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다. 다른 나라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2층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을 보려고 계단을 오르는데 안내해 주신 선생님께서 관람 오신 분 중에 80~90세 쯤 되보이시는 할아버지께서 배재학당 다닐 적 추억을 되살리며 난간을 타고 내려오려고 하신 걸 힘들게 말린 적이 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 말을 듣고 나니 배재학당이 할아버지들께는 행복한 추억이자 교육의 요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난간은 배재학당이 있을 당시에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2층 상설전시관에서는 20세기 초 정동의 풍경과 교육과 기독교 전파에 노력한 당시 선교사들의 다양한 활동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고, 아펜젤러의 사돈지간이었던 선교사 윌리암 아서 노블 가족의 생활모습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리고 배재학당 설립자의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와 그의 아내 루스 노블 아펜젤러의 일생 등에 대해 알 수 있다.

기획전시관에선 개관전 <한국 근대와 선교사 : 아펜젤러와 노블 가족>이 전시되고 있다. 아펜젤러와 노블 가족이 지니고 있던 한국 관련 유물들을 통해 한국근대화에 미친 선교사들의 영향과 그들이 돌아본 한국에 대해 알려준다.

2. 정동길(서울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 이화 박물관, 예원학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을 둘러본 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갔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이었다.

평리원은 근대 개혁의 상징적인 관청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1919년 일본은 이곳에 조선총독부 조사국 분실을 설치하고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여 탄압했다고 한다. 또, 1928년에는 일제 강점기 때 경성 3법원으로 불리던 ‘조선고등법원’, ‘경성복심법원’, ‘경성지방법원’이 이 건물로 들어왔고, 1925년에는 일본에서는 적용되지 않은 치안 유지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 독립 운동가들과 한글 연구 단체인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탄압했다고 한다. 고상함의 왕 미술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탄압 되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서울 시립미술관을 나와 정동 제일교회에 갔다. 배재학당을 설립하신 선교사 아펜젤러께서 세우셨다고 한다. 겉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정동 제일교회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씨앗을 뿌린 교회로 민중드을 계몽시키는 데 앞장섰고, 각종 강연회와 음악회를 열어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또한 독립운동을 도운 교회다.

그 후 덕수궁 도서관이었던 중명전을 찾으러 정동 길을 돌아다녔다. 중명전과 나의 숨바꼭질에서는 내가 결국 지고 말았다. 중명전은 1905년 11월 18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던 곳이다. 다음에 가면 꼭 찾아보기로 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박물관인 이화여고 심슨박물관으로 출발했다. 이화박물관은 유관순 열사가 공부했던 곳인데 지금은 공사중이어서 관람할 수 없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덕수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예원학교 담장에는 다국적 언어 LED작품<신세계언어>가, 맞은 편에는 벽화가 아름다웠다. 신구의 조화가 멋드러지는 아이디어인 것 같다.

3. 덕수궁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으로 덕수궁의 동문이었다고 한다. 정문은 현재 자리를 못잡고 있고 대한문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대한문 앞에는 넓은 서울광장이 있다. 1919년 3월 1일에는 독립을 외치는 우리 민족의 만세소리로, 1987년에는 민주화를 외치는 시민들의 구호로 가득찼던 거리이고, 2002, 2006년 월드컵을 응원하며 ‘대한민국!’을 외치던 함성이 이곳을 가득 메우기도 했었다고 한다. 지금 서울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도심 속 쉼터로 사용되고 있다.

대한문을 들어서니 문이 3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가운데 길은 임금이 드나드는 문이고 양쪽의 두 문은 문반과 무반이 지나다니던 문이다.

대한문을 통과하면 다리가 하나 있는데 금천교라고 한다. 금천교도 대한문과 같이 가운데는 왕이, 오른쪽은 문반, 왼쪽은 무반이 각각 지나다녔다. 이 길을 ‘삼도’라고 한다. 삼도를 따라 앞으로 걸어가자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중화문이 있었다.

중화문 앞에 서자 ‘이 문이 정말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문 맞나?’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현재 중화문 양옆엔 담의 역할을 하는 회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화문도 회랑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그 앞 가로로 난 길을 넓히면서 없애버린 것이라고 한다.

중화문을 지나자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이 보였다. 중화전은 경봉궁과 비교 했을 때 지붕이 무척 커보이는데, 1904년 큰 화재로 인해 복원을 하면서 건축 비용이 많이 들어 단층으로 복원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중화문의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이층 건물인 석어당이 있었다. 임금이 평소 업무를 보던 편전으로 단청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준명당과 즉조당이 보였다. 즉조당과 준명당 또한 석어당처럼 편전으로 쓰였다. 고종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온 뒤 즉조당을 태극전으로 고치고 중화전이 완공된 1902년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석어당 앞 계단을 내려와 왼쪽 작은 문으로 들어가 보았다. 침전과 편전인 함녕전과 덕홍전이 있었다. 함녕전은 침전이다 보니 난방을 위해 온돌 장치가 있었다. 동쪽과 서쪽 벽에는 아궁이 입구가 두 개씩 있었는데 1904년에 덕수궁에서 큰 불이난 지점이라고 전해진다고 했다. 덕홍전은 외국 사신들을 접견했던 곳으로 하나의 공간으로 지어져 있었다. 바깥에서 볼 땐 전통적인 궁궐 같지만 안에 있는 장식 중에는 황금색 봉황머리 장식이나 큰 이화문양도 새롭지만 천장의 샹들리에는 아주 색다르다. 요즘에 보면 너무 단순하지만 그래도 당시 시골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을 땐데 이런 조명을 달았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함녕전과 덕홍전을 다 둘러본 후 황제의 휴식공간이었던 정관헌에 가보았다. 궁궐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적인 요소가 많지만 철제 난간에는 소나무, 사슴, 박쥐 문양등으로 장식한 한국적인 느낌도 있었다. 이곳에선 고종황제가 순종과 함께 음악도 듣고 커피도 마셨던 공간이다. 토요일에는 정관헌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아 난 역사속 고종황제와 순종이 앉았던 자리를 찾기 위해 모든 의자에 앉아보고 상상속 차 한잔을 마셨다.

전통적인 요소와 서양적인 요소를 섞어 지은 정관헌을 떠나 서양의 건축 양식으로만 지은 석조전에 갔다. 재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을 사용했다. 석조전은 덕수궁미술관으로 현재는 ‘한국 근대 미술 걸작전’을 열고 있다. 계속 둘러보던 중, 문득 내가 많이 본 그림이 있었다. 「몽실언니」의 겉표지였다. 약간 다르지만 몽실언니를 한번 쯤 읽어본 사람은 그 겉표지가 떠오를 것이다.

4. 황궁우를 끝으로...

덕수궁을 둘러본 후 서울광장으로 나와 황궁우에 갔다. 황궁우는 고종황제께서 대한 제국을 선포하신 후 원구단(지금의 조선호텔자리)을 세우시고 2년 후에 세운 3단지붕 건물이다. 원구단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황궁우만 남아있다. 이걸 보니 모양이 비슷해서인지 중국의 ‘천단’이 생각났다.

이번 정동 탐방은 안타까움이 느껴지는 곳이 많았다. 오래 되지 않은 역사의 현장이라서 그런지 그 아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참고 : 「덕수궁과 정동」- 스쿨 김영사)

김채림 기자 (서울고명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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