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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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실 (서울이문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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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탐방-조상의 혼이 담겨 있는 역사 교육의 장

2월 25일, 독립기념관으로 우리 청와대 어린이 기자단이 초청 교육을 갔다. 각자 청와대 앞 분수광장, 강남 고속터미널, 천안역, 독립기념관 등으로 모였다.


독립기념관에 도착 후 사무처 강당에서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오리엔테이션에서 탐방 시간동안 기자단을 이끌어 주실 임정은 선생님과 만났다.

독립기념관은 수많은 외침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고, 전시, 교육하는 곳라고 소개해주셨다.. 그리고 10시 45분부터 전시관 3곳을 관람하고 입체영상관에서 도토리 훈장을 관람했다.

전시관에서 그동안 잘 몰랐던 역사와 사실 등을 잘 알 수 있었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신식훈련을 받게 된 사람들은 월급을 잘 받을 수 있었는데, 신식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월급이 밀리고 잘 받지 못했었다. 참다못한 그 사람들이 신식 훈련을 받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 위에 있는 일본 사람들을 습격했다. 이 습격을 임오군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제물포 조약이라는 것을 맺었는데, 습격한 것을 물어내고 사과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런 습격이 일어날까 불안하기 때문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맡게 되었다.

서양문물을 반대하는 동학이라는 종교가 생겨났는데 이 동학은 아무리 어려워도 참고 견디면 괜찮아진다, 일본에게 남의 나라 간섭 말고 너네 나라 가라, 윗사람들 잘해서 우리들 좀 잘 살게 해라, 정치 좀 잘해라 등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종교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서민들은 동학을 따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맡게 되었다. 그러자 농민들이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농민들은 농기구로, 일본과 일본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농민들은 더욱 힘들고 어려워졌다.


사발통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거사에 동의한 20여명의 이름을 사발을 뒤집어 원을 그리며 써놓은 것이라고 한다.

1904년에 을사늑약이 있었다. 그런데 이 을사늑약을 사람들은 흔히 을사조약이라 부른다. 하지만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이다.

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립군 ‘체포’가 아니라 독립군 ‘피체’라고 해야 한다.

안중근이 일본 감옥에 갇혔을 때, 감옥 안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적이라도 안중근의 나라를 위한 마음과 죽음이 코앞인데 당당한 마음을 가진 것에 감동하여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일본에게 진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패하게 되었다.

황국신민서사 기반석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제는 1937년부터 ‘황국신민서사’라는 충성 맹세문을 만들어 한국인에게 외우게 했는데, ‘황국신민서사주’는 이것을 돌에다 새긴 것이다.

학생들에게 서사의 내용을 돌에 새겨서 오게 하여 황국신민서사서주를 세우기 위한 기반석으로 하였다.

1.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2.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

3.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 이 세가지가 당시 학생들에게 외우게 한 황국신민서사의 내용이다.


전시관 관람 후 입체영상관에서 ‘도토리 훈장’이라는 4D 입체영상을 보았다.

주인공인 한얼이는 할아버지(길수)가 쓰러져 실려간 응급실에서 할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소중하게 간직해온 도토리훈장과 낡은 사진을 건네받았다. 도토리훈장은 오래 전 한얼이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난 아버지(만석)을 그리워하며 만든 훈장이다. 한얼이는 이 훈장의 이상한 기운에 휩싸여 과거로 돌아간다.

한얼이가 떨어진 곳은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는 어느 계곡이었는데, 일본군에게 발각된 한얼이는 만석에 의해 구출된다. 한얼이는 죽을 수도 있었던 만석을 구해주고 훈장과 사진을 건네준다. 만석은 한얼이에게 길수에게 전해주지 못한 시계를 전해주라며 맡긴다. 다시 돌아간 한얼이는 할아버지에게 시계를 건네주고, 그걸 받은 할아버지는 기운을 차렸다.

도토리 훈장 상영 후 점심식사와 자유시간을 가진 뒤 독립군 체험학교로 이동했다.


독립군 체험학교에서 독립군에 대해 배웠다. 독립군은 우리나라에서는 탄압이 심했기 때문에 만주, 시베리아, 간도, 중국 등에서 활동했다.만주는 만리장성의 이북지역이다.

처음에는 3.1 운동을 통해 평화적으로 우리나라를 되찾으려 했지만, 통하지 않자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독립군 첫 전투는 봉오동 전투이다. <적을 대파> 크게 패해 달아난 적은 45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6월 7일의 전투에 대한 우리 군대의 소식-

두번째 전투인 청산리 전투에서는 독립군의 수는 3,000명, 일제는 5,000명이었지만 우리나라가 이겼다.

다 배운 후, 독립군 학교 막사 만들기 활동과 독립군체험학교 체험장 관람을 했다.

독립군 학교의 대표적인 학교가 신흥무관학교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0년동안 열었고, 3500명의 학생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 쪽에는 강이 있엇는데, 이유는 적이 오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해서였다.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중국 서간도 지역은 한반도에 인접해 있고 한국인 이주자가 많으며 일제의 위협이 적어서 독립운동기지로 적합했다.


신흥무관학교의 주요인물로는 설립자인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사령관이자 교관이었던 지청천 선생이 있다. 그 중 김동삼 선생은 청산리 대첩에 참가했던 훌륭한 인물이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과서는 유년필독으로 역사, 지리, 인물, 풍속이 같이 들어있다. 신흥학우보는 신흥학우단의 기관지이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오전에는 군사학과 일반과목을 배우고, 오후에는 군사 훈련과 농사를 지었다.



신흥무관학교 사람들은 주로 옥수수, 감자, 콩장, 좁쌀밥, 강냉이 죽 등을 먹었다. 좁쌀밥도 아주 조금 밖에 못 먹고 더구나 썩은 좁쌀밥을 먹었다.


두 활동이 끝난 후 간식시간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고마우신 독립군들을 기리는 묵념을 했다.

묵념 후 독립기념관 탐방 일정이 모두 끝났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시고 애쓰신 고마우신 독립군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독립군과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유익하고 보람된 탐방이었다.

윤한실 기자 (서울이문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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