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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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연 (설봉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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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독립기념관

설레는 마음을 한 가득 안고 독립기념관에 도착하였다. 1984년 8월 15일, 이름 그대로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독립기념관을 들어서는 순간 웅장한 겨레의 탑과 그 주변에서 휘날리는 수많은 태극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우선은 ‘겨레의 시련’ 을 중심으로 다룬 ‘제 2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근처에 낯선 서양의 배가 접근을 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루를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는 흥성대원군이 내세웠던 "서양문물을 받지 말자" 라는 주장이 더욱 강했고, 이런 내용을 담아 세워진 ‘척화비’도 세워졌다. 하지만 몇몇 신하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화’ 를 고집하였다.


그러던 중 운요호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일본은 이 일을 계기로 억지로 강화도 조약을 맺게하였다. 물론 평등하지 않고, 일본에게 이익이 많이 돌아가도록 말이다. 또한 조선은 일본에게 최초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뒤로 일본인들은 별기군 이라는 군대를 만들고 월급도 넉넉히 주었다. 그러나 관군은 제대로 월급도 못 받고, 화가 나 있었다가, 결국엔 임오년 (1882년) 에 군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훗날 임오군란이라 불린다. 일본은 이 피해를 물어낼 것을 요구하였고, ‘재물포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나라의 문을 열어주면서 피해도 있었지만 ‘전화, 전차, 덕수궁을 통해 알려진 전구, 천연당 사진관 ’ 등의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편리함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는 나라를 지키려던 우리 민족의 끈기가 담긴 ‘제 3 전시관’으로 향했다. 그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내용은 바로 ‘ 조상님들이 어떻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는가? ’ 에 관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살펴본 것은 최재우 선생님이 만드신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띄고 있는 동학이었다. 많은 백성들이 동학을 선호하자, 예부터 유교를 섬겨왔던 양반들은 관군을 일으켰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이다. 그 후 1904년 을사늑약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를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한 우리 민족의 의지가 승병, 의병이 일어나게 하였다.


일본의 왕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분들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그로 인해 피체되었다.

흥미진진해지고 있던 나는 벌써 나의 발걸음이 정말로 겨레의 함성소리가 들리는 듯한 ‘제 4 전시관’을 향하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3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대한 독립 만세!" 라는 목소리와 태극기의 물결이 일렁이는 3.1운동이 행해졌다.


무력으로 일본을 쫓아내겠다는 주장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군의 따사로운 눈길을 피해 만주, 시베리아 지역으로 가서 몰래 신흥무관학교 를 세워 독립군을 만들어 훈련시켰다고 한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가장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곳은 신흥무관학교 복원 건물이었다. 이곳에서는 신흥무관학교 모형도 만들고, 게임도 하였으며, 독립군들의 생활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독립기념관을 나서면서 새롭게 배운 내용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 되어서 든든하였고, 첫 탐방이었지만 정말 값진 경험을 하고 와서 즐거웠다.

임하연 기자 (설봉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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