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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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현 (불로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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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 타오르는 독립 열사들의 마음 속으로


2월 25일 수요일, 드디어 나를 포함한 푸른누리 기자단이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에 가게 되었다. 천안까지는 3시간이나 걸렸지만 차 안에서 설레는 내 맘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번 탐방에서는 1910년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점기 이래 우리 나라가 광복을 맞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한 독립 열사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독립 기념관과 그 당시 광복을 위해 미래의 기둥들을 기르던 독립 학교 두 곳을 체험해 볼 수 있다. 내가 이 탐방을 뜻깊게 여겼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억압되고 착취당하는 그런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그 누구보다도 컸기 때문이다.

겨레의 시련-제 2 전시관

제 2 전시관에서는 1910년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식민지로 전락한 때부터 우리 겨레의 고통받는 모습이 잘 나와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농민들이나 독립 열사들이 활동을 했지만, 일본 관리들은 정말 잔인했다(옆 사진 참조). 강제로 을사늑약(흔히 을사조약이라고 알고 있지만, 00조약이라는 말은 서로 협상하여 내린 약속을 말하고, 00늑약은 한쪽에서 강제로 약속시킨 조약을 일컫는 말이다)을 체결시키고, 네덜란드에 우리 나라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특사를 파견한 일인 ‘헤이그 특사 파견’이 실패한 뒤 식민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보니 옛날에 한 박물관에서 마름모꼴로 된 고정 감옥이 떠올랐다. 그 고정 감옥은 한 사람이 겨우 서 있을 정도로, 다리를 구부릴 수도 없이 그냥 서 있어야 했다. 몇 분만 있어도 다리가 저리고 아픈데, 일주일도 넘게 그 감옥에 갇혀 있었을 독립 열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커서 내 꿈인 UN 사무총장이 된다면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나 신하 나라로 삼아 마음대로 다스리거나 그 나라에서 노동적 또는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없게 하는 법을 만들 것이다.

나라 지키기-제 3 전시관

이렇듯 일제 강점기 시대에는 우리 겨레가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전국 각지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쳐 광복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신 독립 열사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안중근 의사이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의 하얼빈에서 일본의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 바쳤다. 그는 한때 동지들과 함께 네 번째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고 쓰기도 했다. 나는 손가락을 자른다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고 무서운데, 진짜 손가락을 잘랐다니 안중근의 조국을 위하는 마음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알만하다.


대표적인 열사 하면 역시 안중근과 함께 유관순도 생각난다. 유관순은 우리의 나이(11살)에 비하면 언니, 누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 옥사하였다. 역시 독립을 위해서라면 남자, 여자를 불문하고 최선을 다 한 독립 열사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겨레의 함성-제 4 전시관, 독립군 학교

독립 열사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를 일본으로부터 되찾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대한의 국민들이다. 국민들은 한 손에 태극기를 들고 평화적 시위를 하였다. 유명한 시위로는 우리 민족의 독립하고자 하는 역량을 온 세계에 보인 3.1 운동(당시 인구가 약 2천만명이었는데, 3.1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의 수가 무려 200만 명, 즉 10분의 1이 참여했다)과 유관순을 지도자로 한 아우내 장터 시위 등이 있다. 이런 시위들의 공통점은 바로 무기를 앞세운 폭력적 시위가 아닌 평화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광복을 위해서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리 평화적으로 나라를 되찾길 바랐다.


전시관들을 둘러본 후에는 당시 가장 필요했던 일본과 싸우는 독립군을 길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신흥 무관학교를 본떠 만든 독립군 학교를 둘러보았다. 그 곳에 계신 안내 선생님께서 독립군들은 매우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한다. 밥은 좀 먹은 좁쌀로 만든 밥이었고, 그나마 우리의 반 정도밖에 먹지 못했다고 한다. 독립군들은 더 심했다. 며칠 동안의 강행군에 발이 부르트고 동상에 걸렸고, 며칠 동안 감자 5-6알 정도밖에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든 생활을 이겨내면서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많은 독립군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한때 일본의 식민지라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많은 열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에 있는 대한민국, 우리는 영원히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독립 열사들과 그 업적을 길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특히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반찬 투정을 하기도 했던 내가 부끄럽다. 앞으로는 힘들었던 생활을 한 독립군들을 떠올리며 반의 반만이라도 닮아야 할 것이다.

정도현 기자 (불로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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