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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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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연 독자 (백일초등학교 / 5학년)

추천 : 45 / 조회수 :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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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독립기념관에서 박진우 학예연구사님과 인터뷰

올해로 91주년이 되는 3. 1절을 맞이해서 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또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으로 향했다. 나주는 배의 고장답게 차를 타고 지나가는 곳곳마다 배 나무들이 많이 늘어서 있었다. 독립기념관에 도착하자 박진우 학예연구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시고 독립기념관 이곳저곳을 소개시켜 주셨다. 독립기념관엔 여러 영상자료들과 모형으로 재현된 사람들의 모습들 그리고 학생 운동의 발단인 나주역까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또 인터뷰에도 응해 주셨다.



Q.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어떤 곳입니까?

청와대 어린이기자단 여러분, 안녕하세요?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소개하겠습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의 3대 독립운동 중 하나인 학생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인 ‘옛 나주역’에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우고자 2008년 7월 25일 개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주’는 전남 나주시의 지명입니다. 그리고 ‘독립’이란 다른 나라의 힘이 아닌 우리나라 스스로 나라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하는데 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독립된 나라를 이루려고 했던 모든 활동을 독립운동이라고 한답니다. 이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내내 있었는데 저희 기념관은 그 중에서도 1929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학생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한 곳입니다. 이 기념관이 작게는 80여 년 전의 학생독립운동을, 크게는 일제강점기라는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합니다.


Q. 1929년 광주에서 학생들이 항일투쟁을 일으켰는데 그 발단이 이곳 나주입니까?

예, 맞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나주에는 지금의 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 소학교) 수준의 학교만 있었습니다. 때문에 지금의 중․고등학교 수준의 학교를 다니려면 기차를 이용해 인근 도시인 광주로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나주에 살고 있는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 모두에게 해당되었습니다.

그런데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나주역에 도착했는데 개찰구를 나오면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그 싸움은 다음날 통학기차에서 더 큰 싸움으로 번졌고, 그 사실이 광주고보(현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알려지면서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나주역에서 있었던 일은 사소한 패싸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으로 퍼져나간 것입니다. 이후 학생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930년 3월까지 194개교 5만 4천여명(당시 학생 수의 절반)의 학생들이 참여한 독립운동으로 중국과 일본 등으로까지 번져나갔습니다.


Q. 나주역에서 벌어진 사건과 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예, 지금부터 81년 전인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5분경 나주역에 통학생을 포함한 30여 명의 승객들이 하차하였습니다. 개찰구에서 후쿠다 등 3명의 일본인 학생이 박기옥, 이광춘 등 여학생들을 밀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보 2학년생인 박준채가 후쿠다를 꾸짖었고 언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후쿠다가 “조선인인 주제에”라는 모욕적인 발언을 하자 격분한 박준채가 구타하여 서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학생독립운동으로 폭발하였습니다.

11월 3일이라는 날짜에 대해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이날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인학생까지 학교에 등교해야 했는데 이유는 일본왕의 생일을 축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날은 전남지역에서 생산된 누에고치를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6만석 돌파 축하식이 거행되는 날이었으므로 광주 시내는 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광주신사(지금의 광주공원)의 광장에 1,200명의 내빈이 초대되었고 도지사를 비롯한 총독부 식산국장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또 시내 5개소에 환영문이 설치되었고 집집마다 일장기를 걸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10월 30일 이후 대치국면으로 격앙된 상태에서 누에고치 6만석행사로 들떠있었던 일본인들의 모습은 더욱 한국인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하였을 것입니다.


Q. 학생독립운동 기간 동안 나주역 사건 이외에 나주학생들은 어떤 활동을 했나요?

예, 좋은 질문입니다. 나주학생들은 단지 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광주로 통학하던 나주학생들은 10월 30일 발생한 나주역 사건에 이어 11월 3일의 1차 시위와 11월 12일의 2차 시위 다음해 1월 8일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 등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신간회 나주지회와 나주청년동맹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던 박공근 등은 11월 27일 농업보습학교 학생들과 나주공립보통학교 5,6학년 학생 25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성공시킴으로써 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답니다.


Q. 당시 나주를 포함한 호남지방의 경제적 상황은 어떠했나요?

예,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호남지방에는 나주평야와 호남평야라는 좋은 곡창지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 지주와 농업회사가 가장 많이 진출했답니다. 1920년대 일본은 우리나라의 쌀 생산을 늘려 대량의 쌀을 헐값으로 일본에 실어갔는데 특히 일본은 대량의 쌀과 여러 자원들을 쉽게 가져가기 위해 철도와 도로를 개통했습니다. 일제가 일본으로 식량을 가져간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호남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식량은 군산, 목포 등에 모아져서 일본으로 실려갔습니다. 이곳 나주에서도 일본은 영산포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출장소를 세워 나주평야를 강제로 빼앗았으며 일본인들의 이민을 적극 유도해서 많은 일본인들이 영산포에 정착하게 했습니다. 그만큼 나주는 일제가 ‘빼앗고 싶어 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Q. 학생독립운동의 의의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학생독립운동은 흔히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전개된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됩니다. 독립운동의 규모 면에서 3․1운동 이후 가장 크게 전국으로 확산된 대중운동입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학내문제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교육문제, 식민지통치문제, 민족독립 등을 제기한 총체적 민족운동이었습니다. 또한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이후 1930년대의 노동․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은 학생독립운동이 1920년대와 30년대의 가교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제시해줍니다.


Q. 3․1운동 91주년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특별전시회가 열린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예, 3․1운동 91주년을 맞아 기획전시와 체험마당을 할 예정입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해가 1910년(경술국치)인데 올해로 100년이 됩니다. 그래서 기획전시는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의 도움을 받아 ‘일제강점 100년 특별사진전’으로 열립니다. 이 사진전에는 일본의 침략과 관련된 40여점의 사진이 전시되는데 2월 24일부터 3월 31일까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오시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삼일절(월) 당일에는 오전 10시부터 태극기모양의 떡을 만들어 저희 기념관을 찾으신 관람객들과 함께 삼일절의 의미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Q. 마지막으로 푸른누리 기자들과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예,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먼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어렵게 되찾은 나라를 더 아끼고, 더 사랑했으면 합니다.

다음으로, 한국과 일본은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합니다. 지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역사적으로 먼 나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과거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즉, 과거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진정으로 치유되어야 한국과 일본이 진정으로 가까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한국과 일본의 정부에서 책임지고 해결해 가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주인인 학생들이 이런 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그 아픈 역사가 또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 푸른누리 기자들과 독자들이 과거의 아픈 역사가 또 되풀이 되지 않고, 미래의 행복한 역사를 만들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진우 학예연구사님 감사합니다.

민세연 독자 (백일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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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률리
2010-03-07 01:02:10
| 세연아 항상 보면 넌 되게 열심히 하는것 같아서 보기좋아
나도 여기 갈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었어 누가? 아빠가...
황혜린
2010-03-31 15:37:16
| 우리 지역이네요 ㅎㅎ 자주가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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