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엽 기자 (호수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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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9일 기자는 가족들과 함께 경주에 있는 포석정에 갔습니다. 처음에 포석정에 들어가니 달랑 수로 밖에 없고 크기가 작아 실망했었지만, 해설사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는 포석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아쉬움이 사라졌습니다.
포석정은 전복-포, 돌-석, 정자-정 한자를 쓰는데, 포석정의 모양이 전복을 엎어놓은 모양이어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고 합니다. 특징은 경주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입으로 토하는 돌 거북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는 이 물을 받는 원형석조가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구불구불한 모양의 곡석이 물을 타원모양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포석정은 30센티미터의 높이에 22센티미터의 길이로 되어 있고, 물 위에 띄운 술잔이 타원모양의 곡석을 되돌아오는 데는 5분이 걸립니다. 이런 모양을 ‘유상곡수’라고 합니다.
포석정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온데다가 일제강점기에 임의로 보수하여 수로곡석의 원형이 많이 파손되었습니다. 이런 수로곡석은 일본, 중국에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포석정처럼 완전히 보존된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길며 아름답고 완벽한 유상곡수는, 우리의 신라시대 포석정이라고 합니다.
또 지금은 사라진 돌 거북상에 대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부연’이라는 사람이 돌 거북상이 너무나 멋있어 그것을 자신의 조상님의 무덤을 장식하고 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 입니다.
해설사 선생님께서는 농담으로 혹시 누군가의 무덤에서 멋진 돌 거북상을 발견 한다면 포석정의 돌 거북상 일지도 모르니 유심히 살펴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모두 하하하 웃었지만 개인의 욕심으로 문화재를 훼손시킨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삼국사기를 보고 이곳을 오직 연회를 즐기던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며 즐겼던 곳으로 이러한 것은 중국 동진시대부터 유행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화려했던 궁정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1998년 포석정의 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음이 알려지고, 제사에 사용된 그릇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비로소 포석정이 연회를 즐기던 곳이 아니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다고 사람들은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굽 달린 토기잔을 물에 띄어 마셨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연회를 즐긴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임금과 신하들이 음복(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술이나 떡과 같은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포석정에 대해 또 다른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왕비·궁녀·신하들과 놀다가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타락한 왕이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나라가 무너져 가는데 어떻게 놀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학자들에 의해 포석정은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사람들에게도 경애왕은 연회를 즐기다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다 돌아가신 것으로 재인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포석정은 신라가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의식을 거행하던 신성한 장소였습니다. 지금까지 포석정에는 많은 오해가 있었지만 새로운 유물 및 유적의 발굴로 인해 역사의 진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새로운 유물, 유적들의 발굴로 인해 매 시간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사실을 보충하거나 고쳐나가 올바른 역사를 깨우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정엽 기자 (호수초등학교 / 6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