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세현 기자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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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를 직접 겪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기자의 친할아버지를 인터뷰해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올해로 연세가 72세이십니다. 1939년도에 태어나셔서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12살이셨다고 합니다. 지금의 제 나이와 같은 나이셨는데, 그 어린 나이에 피난을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의 동네 친구인 박씨 할아버지께서는 전쟁 당시 18살이셨는데,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가한 참전용사이십니다. 고등학생 나이에 전쟁터에서 총칼을 겨누었다는 것이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고향인 강원도 주문진에서 겪었던 전쟁과 피난 이야기를 담아보려 합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년’이 바로, 당시 12살이셨던 저희 할아버지이십니다.
소년이 살고 있던 강원도 주문진은 38선에서 30리(약 12km) 거리 밖에 안돼서 전쟁이 터지면 인민군이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TV나 라디오가 없어서 소년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일요일이라 12살의 소년은 주문진 공설운동장에서 윗동네 아이들과 축구시합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가 아침 7~8시쯤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아저씨가 다가와 “너희들 피난가야 하니 얼른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피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부모님이 피난을 가야한다며 짐을 싸고 계신 모습을 보고, 소년은 나들이를 가는 줄 알고 좋아했습니다.
소년은 장남인데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과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든 보따리를 짊어지셨는데, 그 당시는 지폐의 크기가 상당히 컸고 소년의 집이 부유한 편이어서 보따리가 꽤 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데리고 작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아버지를 뒤따랐습니다. 다른 짐은 아무 것도 꾸려가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여섯 살 남동생을 데리고 가다 업기도 하고, 힘들면 다시 내려서 함께 걸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나들이인줄 알고 떠났던 피난길은, 가다보니 총소리도 나고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도 들리면서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대관령을 넘어 피난을 가는데 한 달 정도가 걸렸습니다. 비어있는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피난을 가고 있는데, 인민군이 이미 앞서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고 하니 계속 남쪽으로 피난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의 가족은 다시 고향인 주문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개입하게 되어 우리 국군이 남쪽으로 다시 후퇴하고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되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1.4 후퇴라고 하는데, 이때 소년은 다시 2차 피난을 가게 됩니다. 추운 겨울, 형편없는 배를 타고 포항 ‘구룡포’를 목표로 남쪽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울진에 내리게 됩니다. 울진은 지금은 경상도이지만 그때는 강원도였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동생이 태어났지만 전쟁 중이라 홍역에 걸렸는데도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 년 후 다시 주문진으로 돌아와 보니, 주문진항에 함포 사격을 해서 주문진이 불바다가 되어있었고 소년의 집도 다 타고 남은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구호물자를 받아서 그걸로 다시 집을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휴전이 될 즈음에는, 소년의 아버지만 따로 피난을 간 일도 있었습니다. 좌익, 우익으로 갈려있던 때인데 아버지가 청년회 회장을 하셔서 반동분자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배를 타고 삼척 쪽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와 양양 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때는 양양이 이북 땅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38선을 기준으로 개성은 남한 땅, 양양은 북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휴전선이 비스듬하게 그어져 개성은 북으로, 양양은 남이 된 것입니다. 어쨌든 양양에 갔더니 북한의 패잔병들이 북으로 돌아가면서 소나 재산을 약탈해가고 여자들을 겁탈한다고 해서, 어머니는 동네아주머니들과 산속으로 피신하셨고 소년은 동생들과 함께 집에 남아있었답니다.
그리고는 1953년, 휴전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고향으로 많이 돌아왔습니다. 알고 보면 멀리 간 것도 아닌 고작 20~30리 정도의 거리라서 피난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전쟁으로 인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상상 이상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주문진에서 제일가는 갑부로 손꼽혔었는데, 전쟁으로 재산을 다 잃고 간신히 땅만 되찾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소년의 가족들은 주문진에서 터전을 잡고 살다가, 소년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 지금껏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6.25 전쟁이 한 달만 늦게 일어났어도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때를 회상합니다. 아버지께서 서울 창신동에 집을 계약해놓고 한 달 후 이사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한 달 늦었다면 서울에서 살다가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 피난가다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만약 전쟁이 안 났다면 주문진의 좋은 집을 팔고 서울로 올 정도의 부를 누리고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못살아도 중류층은 될 정도로 잘 살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봅니다. 하지만 인생을 어찌 알겠습니까.
할아버지의 소년시절이 궁금하여 어릴 때 사진을 갖고 계시냐고 여쭤보니, 전쟁 때 다 불타서 하나도 남은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쟁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해주실 말씀을 여쭈어보았는데, “6.25 사변은 같은 민족이 싸운 것이지만, 남과 북의 사상이 너무 차이가 났어. 만약 지금이 공산주의 치하라면 자유롭게 공부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사유재산도 없고 마음대로 살 수가 없을 것이야. 그 당시 전쟁을 겪은 나이 먹은 사람들은 반공의식이 투철하단다. 우리나라가 유일한 분단국가이므로 젊은 사람들도 반공의식을 갖고 살아야 해. 투철한 안보가 있어야 자유가 있을 수 있다. 국가가 편안해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구나.”라는 당부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피난 이야기를 들려주신 할아버지께 감사드리며,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지금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세현 기자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