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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호 6월 21일

테마기획-한국 전쟁의 흔적을 찾아서 추천 리스트 프린트

엄세현 기자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추천 : 53 / 조회수 : 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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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소년의 피난 이야기

6월 12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를 직접 겪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기자의 친할아버지를 인터뷰해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올해로 연세가 72세이십니다. 1939년도에 태어나셔서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12살이셨다고 합니다. 지금의 제 나이와 같은 나이셨는데, 그 어린 나이에 피난을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할아버지의 동네 친구인 박씨 할아버지께서는 전쟁 당시 18살이셨는데,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가한 참전용사이십니다. 고등학생 나이에 전쟁터에서 총칼을 겨누었다는 것이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할아버지가 고향인 강원도 주문진에서 겪었던 전쟁과 피난 이야기를 담아보려 합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에 등장하는 ‘소년’이 바로, 당시 12살이셨던 저희 할아버지이십니다.

소년이 살고 있던 강원도 주문진은 38선에서 30리(약 12km) 거리 밖에 안돼서 전쟁이 터지면 인민군이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역사 기록을 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TV나 라디오가 없어서 소년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일요일이라 12살의 소년은 주문진 공설운동장에서 윗동네 아이들과 축구시합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가 아침 7~8시쯤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아저씨가 다가와 “너희들 피난가야 하니 얼른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소년은 피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부모님이 피난을 가야한다며 짐을 싸고 계신 모습을 보고, 소년은 나들이를 가는 줄 알고 좋아했습니다.

소년은 장남인데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과 피난길에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돈이 든 보따리를 짊어지셨는데, 그 당시는 지폐의 크기가 상당히 컸고 소년의 집이 부유한 편이어서 보따리가 꽤 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데리고 작은 보따리를 머리에 인 채 아버지를 뒤따랐습니다. 다른 짐은 아무 것도 꾸려가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여섯 살 남동생을 데리고 가다 업기도 하고, 힘들면 다시 내려서 함께 걸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나들이인줄 알고 떠났던 피난길은, 가다보니 총소리도 나고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도 들리면서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대관령을 넘어 피난을 가는데 한 달 정도가 걸렸습니다. 비어있는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피난을 가고 있는데, 인민군이 이미 앞서서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고 하니 계속 남쪽으로 피난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의 가족은 다시 고향인 주문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북쪽으로 진격하던 중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개입하게 되어 우리 국군이 남쪽으로 다시 후퇴하고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되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1.4 후퇴라고 하는데, 이때 소년은 다시 2차 피난을 가게 됩니다. 추운 겨울, 형편없는 배를 타고 포항 ‘구룡포’를 목표로 남쪽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울진에 내리게 됩니다. 울진은 지금은 경상도이지만 그때는 강원도였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동생이 태어났지만 전쟁 중이라 홍역에 걸렸는데도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일 년 후 다시 주문진으로 돌아와 보니, 주문진항에 함포 사격을 해서 주문진이 불바다가 되어있었고 소년의 집도 다 타고 남은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국의 구호물자를 받아서 그걸로 다시 집을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휴전이 될 즈음에는, 소년의 아버지만 따로 피난을 간 일도 있었습니다. 좌익, 우익으로 갈려있던 때인데 아버지가 청년회 회장을 하셔서 반동분자로 몰려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배를 타고 삼척 쪽으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와 양양 쪽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때는 양양이 이북 땅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38선을 기준으로 개성은 남한 땅, 양양은 북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휴전선이 비스듬하게 그어져 개성은 북으로, 양양은 남이 된 것입니다. 어쨌든 양양에 갔더니 북한의 패잔병들이 북으로 돌아가면서 소나 재산을 약탈해가고 여자들을 겁탈한다고 해서, 어머니는 동네아주머니들과 산속으로 피신하셨고 소년은 동생들과 함께 집에 남아있었답니다.

그리고는 1953년, 휴전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고향으로 많이 돌아왔습니다. 알고 보면 멀리 간 것도 아닌 고작 20~30리 정도의 거리라서 피난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전쟁으로 인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상상 이상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주문진에서 제일가는 갑부로 손꼽혔었는데, 전쟁으로 재산을 다 잃고 간신히 땅만 되찾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후 소년의 가족들은 주문진에서 터전을 잡고 살다가, 소년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 지금껏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6.25 전쟁이 한 달만 늦게 일어났어도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때를 회상합니다. 아버지께서 서울 창신동에 집을 계약해놓고 한 달 후 이사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한 달 늦었다면 서울에서 살다가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 피난가다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만약 전쟁이 안 났다면 주문진의 좋은 집을 팔고 서울로 올 정도의 부를 누리고 있었으니, 지금쯤이면 못살아도 중류층은 될 정도로 잘 살았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봅니다. 하지만 인생을 어찌 알겠습니까.

할아버지의 소년시절이 궁금하여 어릴 때 사진을 갖고 계시냐고 여쭤보니, 전쟁 때 다 불타서 하나도 남은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쟁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해주실 말씀을 여쭈어보았는데, “6.25 사변은 같은 민족이 싸운 것이지만, 남과 북의 사상이 너무 차이가 났어. 만약 지금이 공산주의 치하라면 자유롭게 공부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사유재산도 없고 마음대로 살 수가 없을 것이야. 그 당시 전쟁을 겪은 나이 먹은 사람들은 반공의식이 투철하단다. 우리나라가 유일한 분단국가이므로 젊은 사람들도 반공의식을 갖고 살아야 해. 투철한 안보가 있어야 자유가 있을 수 있다. 국가가 편안해야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구나.”라는 당부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피난 이야기를 들려주신 할아버지께 감사드리며,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지금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세현 기자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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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혁
정선초등학교 / 4학년
2012-06-21 15:56:21
| 다시는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는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최리아
서울길음초등학교 / 5학년
2012-06-21 16:48:43
| 엄세현 기자니! 친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생생한 증언을 기사로 잘 옮기셨네요. 좋은 기사 잘 봤습니다. 추천 팍팍!
박요한
서울은로초등학교 / 6학년
2012-06-21 22:07:43
| 저 역시 할머니께 전쟁의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지금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한 마지막 구절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전쟁세대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송규진
서울대곡초등학교 / 6학년
2012-06-22 01:58:59
| 세현 기자님^^ 급하게 기사작성하였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잘 쓰셨네요^^
메인채택 부럽네요~ 정성 듬뿍 담긴 기사 감사해요!
엄세현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2012-06-22 18:32:40
| 이상혁 기자님,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엄세현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2012-06-22 18:34:42
| 최리아 기자님, 감사합니다.할아버지께서 얘기를 재밌게 해주셔서 동화형식으로 재밌게 쓸수 있었어요.^^
엄세현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2012-06-22 18:37:48
| 박요한 기자님, 감사합니다.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게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엄세현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2012-06-22 18:41:07
| 송규진 기자님, ㅎㅎ감사합니다.기자님도 동시 재밌게 잘쓰셨던데.^^
윤상일
서울논현초등학교 / 5학년
2012-06-22 21:05:57
| 기자님의 할아버지께서 전쟁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하셨네요. 할아버지의 말씀을 잘 기억해야 겠어요.
이수진
서울남천초등학교 / 6학년
2012-06-23 10:21:30
| 하루 빨리 통일이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하니다! 추천드려요~
정은교
서울창도초등학교 / 5학년
2012-06-23 22:43:35
| 이 기사를 보니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박상현
성곡초등학교 / 5학년
2012-06-24 16:18:39
| 다시는 6.25전쟁처럼 끔찍한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다.
엄세현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2012-06-24 22:58:32
| 윤상일 기자님.. 할아버지는 그래도 강원도 안에서 왔다갔다 피난했다며 그나마 다른 사람에 비해선 고생을 덜 하신거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엄세현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2012-06-24 22:59:56
| 이수진, 정은교, 박상현기자님.. 저도 전쟁에 대해 잘 몰랐는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어요. 게다가 저랑 같은 나이인 12살에 피난을 다니셨다니 너무 실감나게 마치.. 제가 피난 가는 것인양 상상이 되며 듣게 되었어요.. 어른들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과 같다는
유채연
소사벌초등학교 / 4학년
2012-06-25 08:28:59
| 정말 할아버지께서 많은 경험을 하셨네요.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나실 것 같아요. 정말 놀랍습니다.
윤태영
형일초등학교 / 6학년
2012-06-25 22:14:14
|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저도 할아버지의 전쟁이야기에 가슴이 너무 아파요.
어혜준
우촌초등학교 / 4학년
2012-06-26 13:11:45
| 힌편의 소설 같네요.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김민지
서울원촌초등학교 / 4학년
2012-06-27 13:26:18
| 하루 빨리 한반도에 평화가 오면 좋겠어요.
엄세현
서울돈암초등학교 / 5학년
2012-06-28 23:37:01
| 유채연,윤태영,어헤준,김민지 기자님. 기사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최재용
대신초등학교 / 5학년
2012-06-29 17:13:39
| 다음에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댁에 가게 되면 꼭 6. 25때 이야기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더이상 전쟁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유민
서울선사초등학교 / 5학년
2012-06-29 19:25:34
| 아하 저도 저희 할아버지가 유치원 시절 때 6.25전쟁이 났었다고 하네요
김은서
인천경원초등학교 / 4학년
2012-06-30 07:54:03
| 전쟁... 정말 무섭습니다. 가끔 영화에서 보면...어르신분들께 감사해요. 덕분에 저희가 안전하게 살수있어서...
이다윤
용문초등학교 / 4학년
2012-06-30 20:43:57
| 정말 잘 적으셨네요~ 추천~
정희철
서울덕의초등학교 / 5학년
2012-07-04 20:59:19
| 이야,너무 감동적이네요.제가 6.25전쟁에 있는거 같았습니다.
이야기 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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