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래 독자 (인제남초등학교 / 6학년)
추천 : 13 / 조회수 : 406
지금은 6월입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은 우리 민족이 둘로 나뉘어 같은 민족끼리 싸운 역사상 가장 슬픈 전쟁이라 생각됩니다. 6.25전쟁은 책과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본 기자는 할아버지께 당시 상황을 직접 여쭈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6.25전쟁 당시 푸른누리 기자들 나이 또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그 당시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하루에 30리(12km)씩 피난을 다녔습니다. 운이 좋으면 국군 화물차나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습니다. 콩나물 시루처럼 1칸에 50명씩 탔지만 딱딱한 화물적재함에 앉아서 가도 좋았다고 합니다. 6.25전쟁 발발이 1년이 안 되었을 때는 우리국군에 미군의 투입이 완전치 않아서 전세에 계속 밀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광복 후 2년 뒤에 전쟁이 일어나니, 우리나라는 뭐가 있었겠나?"라고 하셨습니다. 북한은 남한 정복을 목표로 구소련을 통하여 서로 무기를 교류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한은 광복의 기운에 겨워 2년 동안 무기 생산을 하지 못하였고, 아직 국가적인 기반을 잡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이 1년 정도 진행되었을 즈음 미군이 들어왔을 때 전세는 바뀌었습니다. ‘맥아더’ 총사령관의 영향과 더불어 그 당시 미국은 유일하게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미국은 이런 전술을 사용했다고 할아버지가 알려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전투기에서 직접적으로 비행기에서 휘발유를 떨어뜨리면서 군수물품 창고나 북한군인 무리 위를 조심히 돌아다니다 어느 정도 휘발유로 길이 만들어 지면 포병이나 미사일을 떨어트렸다고 합니다. 그럼 불길은 휘발유를 따라 무섭게 번져 적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국군과 미군, 그리고 UN연합군의 합세로 우리나라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압록강까지 전진했지만 중공군 즉 중국군의 인해전술(‘사람 바다’라는 뜻을 가진 전술)을 사용하여 대구까지 물러났다고 합니다. 이것을 바로 1.4후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다시 한 번 백두산까지 진격해 민주주의로 통일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미국 대통령의 압박으로 다시 후퇴하였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대통령에게 항의를 하였지만 미국 대통령은 미동도 하지 않고 맥아더 장군을 은퇴를 핑계로 해임시켜 버렸습니다. 결국 통일은 하지 못한 채 1953년 한민족 간의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잠시 휴전하는 것이므로 아직 전쟁은 약 6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민족간에 서로 겨눈 총부리는 슬프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고 돕는다면 통일은 언젠가 소원이 아닌 실제가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한민족의 총부리가 슬프지 않는 날, 그 날이 꼭 올 것입니다.
김학래 독자 (인제남초등학교 / 6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