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독자 (서울안평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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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다산 정약용 선생을 만나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를 다녀왔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18세기 후반기의 이용후생학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며 ‘백성이 근본이다’ 라고 주장하며 관리가 바른 정책으로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사회 교과와 관련된 ‘잘사는 백성, 부강한 나라로’에서 실학의 뜻과 생겨난 배경, 실학자들이 남긴 업적에 대해 배웠지만 너무 어렵게 느껴져 현장 탐방을 통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후기의 학자인 다산 정약용선생의 생가와 실학 박물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취재를 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의 업적은 우리가 배워서 알 수 있듯이 그중 1796년 수원 성곽을 쌓는데 이용되었던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인 거중기와 5백여권에 달하는 책은 깊고도 넓은 학문 세계로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우리의 고전이 되고 있다.
다산 유적지에는 두물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얕은 언덕에 묘소가 있고 그 아래 빈터에 여유당이라는 다산의 생가가 있으며 기념관과 실학박물관이 세워져 있고 다산 문화거리까지 조성되어 있어 제법 볼만한 관광지로 변하고 있었다. 여유당은 지금은 팔당 호숫가의 외딴 집으로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소내, 또는 두릉이라했고 다산의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 잡았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집 뒷산에 다산 정약용선생이 묻히신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노자의 말을 빌어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지었으며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줄곧 이곳 여유당에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셨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사시던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떠내려갔고 팔당댐이 생기면서 옛 마을은 모습을 잃게 되었지만 1975년 복원한 것이 지금의 여유당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22세에 벼슬길에 올랐지만 1801년 황사영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으며, 그 때 다산은 후학을 가르쳤고 책도 많이 쓰셨다.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이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지었으며 특히 목민심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제시하여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제거하고 경세유표를 통해 국가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위한 원칙을 제시하여 백성들이 보다 편한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을 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생가를 뒤로하고 작은 문을 나오니 그 유명한 거중기모형이 넓은 길 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지나니 2009년 10월에 개관하여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실학박물관이 우리를 반겼다.
실학박물관은 조선후기 실학에 관하여 조사, 연구, 전시 및 교육하는 역사박물관이다. 실학사상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전시를 하고 있는 곳이었다. 제1전시실은 실학의 형성에 대해 알 수 있는데 입구에 있는 영상 화면을 통해 실학이 탄생하게 된 국내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서양문물의 전래, 개혁의 전개와 조선사회의 변화 등을 보여주고 있는 이곳에서는 자명종과, 이수광의 지봉유설, 유형원의 반계수록도 만날 수 있다.
제2전시실에서는 실학의 전개로 경세치용학에 관련된 성호사설, 경세유표, 이용후생학인 의산문답, 열하일기 등을 만날 수 있으며, 제3전시실에는 천문과 지리관으로 별자리를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면서도 백성들을 살폈고 우리 생활을 좀더 편리하게 해주기 위해 끊임없이 발휘된 과학정신은 꼭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어렵게만 느껴지던 실학에 친숙하게 다가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삼매경에 빠져 돌아가실 때까지 학문에 열정을 보였던 다산 정약용 선생. 많은 책을 읽어야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느꼈고 존경하고 본받고 싶다.
이진영 독자 (서울안평초등학교 / 6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