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37호 06월17일

문화 속으로 추천 리스트 프린트

김채은 독자 (용인백현초등학교 / 5학년)

추천 : 10 / 조회수 : 724

뉴스 공유하기 C
					로그 미투데이 트위터 Facebook

아석고택 방문기

아석고택’ 또는 ‘성씨고가’로 불리는 이 한옥은 한국 근현대 건축사와 함께한 집이다. "아석고택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대문을 여시며 성기인 사장님께서 우리 일행을 반겨주셨다.


“채은아 대문위쪽 문양을 보세요, 창살모양이죠? 이 모양은 남자를 뜻합니다.” 대문을 지나서 작은 마당이 있고, 마당 한쪽 끝자락엔 쪽문이 있어서 예전에는 일하는 아랫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도 설명해 주셨다. 마당을 지나 중문이 나왔다.


“중문위쪽을 보세요. 여자를 의미하는 꽃모양으로 되어 있어요.”

“대문은 남자를, 중문은 여자를 의미합니다.”


중문을 지나자 드디어 고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려는 나에게 사장님은 “채은양 기다려요~ 거기 확대 보이죠?`”하고 물으셨다. “확대가 뭐에요?”하고 묻는 나에게 확대는 중문을 지나 집에 들어서기 전에 손을 씻는 곳이라고 알려주셨다.


손 씻는 물을 담아두는 오목한 모양이 복숭아 씨 모양인데 이건 여자들이 씻는 곳이고 또한 옛날에는 대문 앞 석등을 기준으로 왼쪽 길은 사랑채로 가는 남자들이 사용하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안채로 가는 여자들이 사용하는 길로 남자와 여자가 들어가는 길도 달랐다고도 알려주셨다. “와~ 정말 신기해요.” 설명을 들으며 나도 살짝 손을 씻어 보았다.


오죽으로 만들어진 사랑채로 가보니 현재는 지역주민을 위해 문화교실로 개방되어 이 곳에서 서예, 한문, 주역 등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한다. 사랑채를 지나 오죽 숲길을 따라 뒷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100년이 넘은 커다란 회나무가 쓰러져 있었고 한쪽에는 대나무 뿌리들 때문에 석등도 쓰러져 있었다.

많은 시간들이 함께 한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엔 탱자나무들이 담장의 역할을 했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지금은 탱자나무는 없고 나지막한 담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씩 울타리 안으로 고라니가 들어오기도 한다고 하셨다.

[아석헌-1855년]

아석고택(성씨고택)은 역사는 원래 1850년대에 본가가 들어섰다가 그 아들, 손자가 성장하여 일가를 이루자 그들을 위해 집을 이어 짓고 또 이어 짓고 한 것이 네 동의 한옥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라고 한다. 각 일가별 집은 담으로 구분되는데, 시원한 누마루를 자랑하는 아석헌(我石軒)이 가장 먼저 들어섰던 본가로 1855년경에 지어졌으며, 두 번째 집 석운당(石雲堂)은 1860년대 대원군 시절에 지어졌고, 그 당시 서원철폐와 관련해서 서원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기도 했었다고 한다.


[구연정-1890년대]

솟을대문과 안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연못을 중심으로 한 구연정(龜蓮庭)이 있다. 이 건물은 1890년대에 지어진 집이며, 경근당(慶勤堂)은 1920년대에 화장실을 실내로 들여 짓고 유리창을 이용하여 만든 집이라고 한다.

경근당은 사장님이 태어나고 자라며 어린시절을 보냈던 집이기도 하다. 경근당의 주변은 작약나무로 둘러 싸여있고, 옛날에는 집안에 석빙고도 있었다고 한다. 지붕의 기와 모양은 팔삭지붕인데, 모든 집과 창고까지 팔삭 모양으로 지은 것은 그 옛날 부의 상징이었다고 설명해 주셨다.


[일신당]

마지막으로 고택을 나와서 동네 길을 따라 일신당으로 향했다. 일신당은 사장님의 할아버지의 요양소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이 곳은 대동아전쟁과 중일전쟁 사이에 지어졌으며, 반환문(항상 돌아오고 싶은 곳이라는 의미)을 지나 일신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6.25 사변 이후 마을 전체가 집이 다 무너져 오갈곳이 없는 주민들에게 방을 나누어 주고 같이 살았다고도 하셨다. 이 곳 역시 목욕탕과 화장실이 실내에 들여 지어져 있고 아직까지도 잘 보존이 되어 있었다.

참, 일신당에는 특징이 있다. 방, 마루, 욕실, 화장실, 모두 있는데 한가지 주방이 없다. 마을 아래에 있는 고택에서 매 식사 때마다 밥을 해서 이곳으로 가져오셨다고 한다.


[고택의 별채]

아석고택은 기와 너머 첩첩이 기와가 이어지는 전체 6천 평 규모의 대가집 한옥이지만, 필요에 따라 조금씩 규모를 불려간 건축물이므로 전통과 격식에 꼭 맞추어 들어서 있는 곳은 아니며, 각 한옥채마다 당시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그 모양과 형식이 다르다. 따라서 시대별 한옥 변천사를 한집에서 두루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건축역사의 자료로서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한쪽에는 1890년에 지어진 상주의 외갓집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건축물도 있다.


이 곳의 집은 특이하게 한옥의 전통적 요소도 갖추고 있지만 1929년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 지어져 외래 건축의 영향도 절충되어 있다고 한다. 부농주택의 실용적 요소도 갖추고 있고, 전통한옥에 비해서 기둥과 도리, 들보가 가늘고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이 고택은 한국 한옥 발달사의 후기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이 인정되어, 아석헌과 그 주위의 다섯 채 한옥이 경상남도 문화재 제355호로 지정되었다.


[ 아석고택과 양파시배지탑 앞에서 기념사진]

또한 이 지역은 양파 시배지와 마늘로 유명하며 고택 밖으로 걸어 나오면 양파 시배지의 유래를 살펴 볼 수가 있다. 양파는 1908년 원예모범장에서 시험재배되었다는 문헌기록이 있는데 다음해 1909년 석리 아석가에서 우석 성재경 선생의 조부 성찬영 선생께서 처음으로 양파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한국전쟁 직후 농가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성재경 선생이 보리대신 환금작물로 양패를 재배토록 적극 권장하였다고 하며 오늘의 창녕은 전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양파 주산지가 되었다.


아파트에서만 살던 우리가족은 처음으로 한옥에서 하룻밤을 잤다. 도시에선 볼 수 없는 한옥들의 아름다움을 구경하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신 사모님과, 아석고택에 초대해 주시고 꼼꼼하게 설명해 주신 성기인 사장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김채은 독자 (용인백현초등학교 / 5학년)

추천 리스트 프린트

 
 

 

렌즈속세상

놀이터

[책읽는 세상]교보문고 선정 추천도서


Template_ Compiler Error #10: cannot write compiled file "/web/webapp/data/ipress/iprdata7/e3/school.president.go.kr_paper/template/kr/_compile/group/50/1/bottom.htm.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