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 독자 (성동초등학교 / 4학년)
추천 : 48 / 조회수 : 1237
2010년은 대한민국을 피로 물들게 했던 6.25전쟁이 일어난 지 꼭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에 전쟁기념관과 조선일보사는 새로운 시각으로 6.25전쟁을 재조명하여 잊혀져가는 6.25전쟁을 되새기고자 특별기획전과 DMZ(비무장지대) 사진 영상전을 마련하였다. 2010년 6월 8일 수요일, 30도의 내리쬐는 햇빛을 가로질러 전쟁기념관 앞마당을 지나 전시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더위 속에서 전쟁을 했을 텐데 군인 아저씨들도, 우리를 도와주었던 UN군들도 너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회장에 제일 먼저 들어서면 K2 전차가 장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군복모양으로 색칠을 한 것만 봐도 조금 겁이 났다. 6.25전쟁을 기념하는 포스터가 있고, 피난민들과 국군, 인민군의 밀랍인형이 있다.
피난하는 모습을 보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피난 가셨다던 말씀이 어떤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50년. 평화로움 속에 갑자기 일어난 전쟁으로 피난을 가야했던 사람들, 먹을 것이 없어서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사람들과 그 밖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되어있어서 마치 내가 1950년 그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기를 업고 피난 가는 장면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는데, 그건 아마도 외할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 때문인 것 같다. 할머니는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난 해 7월 25일에 태어나셨다. 증조할머니의 자녀는 11남매였는데, 갓난 외할머니를 데리고 피난을 하던 중 할머니가 “응애응애” 우니까 같이 피난 해 있던 사람들이 아이가 울면 적들에게 들킬지 모르니 어서 이 자리에서 나가달라고 했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식구들을 데리고 그 곳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데, 뒤에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할머니께서 막 나오셨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그 곳에 폭탄이 떨어져서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결국 우리 외할머니가 우는 바람에 다른 모든 식구들이 살 수 이었던 것이다. 또 그 덕분에 내가 지금 이렇게 운 좋게도 “푸른누리” 기자를 하면서 이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피난을 가다가 혹은 전쟁에 싸우다 죽은 사람들로 인해 이산가족이 많이 생겨 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이 있는데 북한의 죽음의 방이라 불리는 수용소내의 벌감방이다. 김정일 수령의 신년사를 외우지 못하면 그 벌로 7~10일 동안 폭 60cm, 높이110cm 정도의 벌감방에 구류되는데,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좁은 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보면 운동 부족으로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좁은 방에서 사람들이 갇혀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내 숨이 막혀오는 것 같이 답답했고,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관에는 이 밖에도 6.25전쟁에 대한 많은 기록들과 사진들, 최첨단 체험 영상 등을 직접 관람해 볼 수 있으며, 전쟁의 시작에서부터 수많은 전투와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한국군이 어떻게 싸웠는지, UN이 어떻게 도와주었는지, 또 국민들이 어떻게 피난을 하며 전쟁을 이겨냈는지 생생하게 전시되어있다. 또 오늘날 북한의 생활모습과 북핵의 실상, 정치범 수용소의 모습, 그리고 공개되지 않았던 비무장지대의 모습이 사진과 영상을 통해 다양하게 보여진다.
전시회를 둘러보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나오는 길에는 천안함의 전사자들에 대한 이름이 새겨진 벽에 조의도 표했다. 버스를 타려고 건넌 길목에 국방부에서 내걸은 마음에 와 닿는 문구가 있어서 적어본다.
기억하겠습니다. 참전 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만들겠습니다. 강한 군(軍). 더 큰 대한민국을.
전시회장을 찾는 사람들은 어린 학생들도 많았지만, 우리 국군 아저씨들과 미군 아저씨들, 그 가족들, 참전 용사 등도 많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6.25’의 모든 것이 11월 30일까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전시된다 하니 이 전쟁에 대해 모르는 우리들과 우리의 부모님들이 꼭 한번 방문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김성동 독자 (성동초등학교 /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