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고은 독자 (와석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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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 일요일 아침에 일찍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구포시장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제가 구포시장을 간 뒤 제일 먼저한 일은 구포시장 상인회를 찾아가서 구포시장의 역사와 유래를 알아보고 자료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자료를 가방에 소중히 챙긴 후 시장의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사진을 찍고 맛있는 음식도 여러가지 먹었습니다. 평소 대형 마트에서 볼 수 없었던 송편을 만드는 모습, 김부각을 만드는 모습, 여러가지 나무들과 꽃들이 가득한 화원, 엄청나게 큰 생선가게, 과일가게, 속옷가게, 반찬가게, 그릇가게, 가격파괴 옷가게, 채소가게, 식육점, 분식집, 이불가게, 화장품가게, 무서운 멍멍이 가게 등 너무나도 많은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일하시는 모든 할머니, 할아버지, 아주머니, 아저씨 모두 친절하고 모두 밝게 웃고 계셔서 늘 만나는 이웃처럼 반갑고 편안했습니다.
구포장은 조선시대 감동진 나루터와 감동창이 있는 강변에서 장이 섰기 때문에 장터의 지명도 감동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낙동강 하류지역의 생활물자를 모아 구포의 감동장은 3자가 붙는 날과 8자가 붙는 날에 장이 서는 5일장이라고 합니다.
농어민들은 그들의 생산물인 곡물이나 가축, 어염, 수공업품, 등을 가지고 나와서 서로서로 물물교환이나 미포, 전화를 매개로 하여 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물건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장시에는 상품을 지고 인근의 각 시장을 정기적으로 순회하면서 행상을 하는 보부상들이었다고 합니다.
구포장터에는 역사적 기록도 남아있는데 1914년 이곳 구포장터에 큰불이 발생하여 상가와 주택이 모두 타고 막심한 피해를 내고 이재민을 낳았다고 합니다. 주민의 구호와 장터의 재건을 위해 구포 주민들이 의연금을 내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구 장터 박석골 바위에 세워진 구포동 화재의연기념비에 의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19년 3.1독립 만세 시위가 이곳 장터에서 청년들이 주도아래 일어나 장날에 모인 장사꾼 1000여명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역사책에 나온다고 합니다.
구포의 감동장이 조선시대부터 번창하여 일제 침략기에도 낙동강 수로를 이용한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1930년대에 들어와서 강변에 제방을 쌓을 때 주위 환경의 변화로 새장터로 옮겨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5일장이 열리고 있는 구포 새장터는 1932년 당시 구포면 장익원면장할아버지의 노력으로 공설시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새장터는 8.15광복이후에도 계속 번창하여 장날이 되면 쇠전이 섰고 나무전에는 땔나무가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쇠전은 뒤에 대리둑 너머로 옮겨 갔다가 1970년대에 없어지고 나무전은 무연탄이 나오기가지 쇠전과 함께 구포장이 명물이었다고 합니다 . 그리고 구포장터는 해방 이후 명물이 된 구포국수의 생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산에 놀러오시면 구포시장을 구경하시고 구포국수도 꼭 드시고 가세요. 기사 작성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상인회 가족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더운 여름 지치지 마시고 시장 가족을 위해 많이 봉사해주세요.
정고은 독자 (와석초등학교 / 6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