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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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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독자 (동학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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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정조대왕을 만났어요~

2009년 10월 6일부터 수원화성박물관에서는 특별기획전 ‘정조 예술을 펼치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을 찾은 11월 8일은 가을빛으로 곱게 물든 나무들이 수원화성을 꾸며 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수원화성이 마주 보이는 박물관으로 가서 정조대왕의 예술 작품들을 감상했다.

‘정조 예술을 펼치다’ 전시는 기원, 효친, 치인, 편수, 수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원(起源, 홀로서다)에서는 정조대왕의 어린 시절 그림과 글씨를 볼 수 있었다. 정조대왕의 어린 시절 글씨모음은 정조대왕이 동궁 시절에 쓴 글씨들을 모아서 만든 책으로 38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홍낙술이 쓴 설명과 함께 있다. 어린 정조대왕이 큰 외숙모에게 쓴 한글편지도 있는데 편지 끝에 ‘원손’이라고 쓰여 있어 세손으로 책봉되기 전인 여덟 살 이전에 쓴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친(孝親, 뿌리를 기억하다)에는 정조대왕의 효 관련 글과 비문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조대왕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쓴 경모궁 현판은 1776년 즉위하던 해에 쓴 글씨로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술궁에 걸려 있던 편액인데 경모란 매우 사모한다는 뜻이다. 정조대왕의 할아버지 영조는 1764년 사도세자의 사당을 세우게 하고 ‘수은묘’라고 하였다. 정조대왕은 즉위한 뒤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창경궁에 새 사당을 짓게 하고 ‘경모궁’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정조대왕은 자주 경모궁을 찾았는데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미리 와서 주무시기도 하셨다.


사도세자가 1760년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온양의 행궁으로 갔을 때 군수 윤염에게 품(品)자 형태로 세 그루의 홰나무를 심어 그늘을 드리우도록 하였다. 36년이 지나는 동안 홰나무 줄기가 뻗어 사도세자가 말한 것처럼 되자 고을 수령이 나무 둘레에 대를 쌓게 하고 조정에 알렸다. 정조대왕은 경모궁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날 이 말을 듣고 나무를 심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고 이 사실을 기록한 비를 세우게 한 뒤 비 앞면에 ‘영괴대(靈槐臺)’를 써서 내려주었는데 영험한 기운을 지닌 홰나무가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치인(治人, 사람과 함께하다)에서는 정조대왕과 신하의 글·그림을 볼 수 있다. 수원부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으로 만들 때 그 일을 맡은 수원부사에게 보낸 편지인데 백성들의 무덤을 함부로 없애거나 집을 부수거나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당부의 글이다.


신하 채제공이 벼슬을 사양하자 서운한 마음으로 허락하는 편지도 있고, 채제공에게 부채와 선향을 내리면서 보낸 편지도 있으며 채제공의 시에서 운자를 딴 시도 있다.

편수(編修, 책에서 길을 찾다)에는 정조대왕의 시·글을 한데 묶은 책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춘추를 완독한 날 지은 시와 정조대왕의 시문집 홍재전서 등을 볼 수 있다.

수기(修己, 마음을 다스리다)에서는 정조대왕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파초도, 국화도, 사군자도 등이 있다.


왕이나 왕족이 이름을 휘(諱)라고 높여 부른다. 조선시대는 왕의 휘로 사용된 한자가 들어가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꼭 써야 한다면 같은 뜻을 지닌 다른 한자로 바꾸어 쓰거나 발음만 같고 모양이 다른 글자를 찾아 써야했다. 그래서 백성들이 자주 쓰는 글자로 이름을 지으면 불편하기 때문에 왕의 휘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한자를 썼다.


정조대왕의 휘는 한자로 ‘李祘’이라고 쓴다. 祘은 ‘산’과 ‘성’ 두 가지로 발음이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산’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정조대왕이 편찬하도록 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 이 글자를 ‘셩’으로 써 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정조대왕의 이름이 ‘이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대왕은 다양한 호를 가졌다. 호는 본래의 이름 대신 쉽게 부를 수 있게 만든 또 다른 이름이다. ‘홍재(弘齋)’는 정조대왕의 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 세손 때 자신의 서재를 부르던 이름이다. 정조대왕은 왕이 학문을 갈고 닦는 가장 큰 이유가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풀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서 뜻을 갖고 세상을 넓고 크게 보는 눈을 기르자는 뜻에서 넓을 홍자를 따왔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호도 있는데 국왕인 자신을 달에 비유하고 세상 사람들은 물에 비유하여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땅 위의 모든 물과 시내를 비추듯 백성들에게 은혜와 덕을 베풀겠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만기여가(萬幾餘暇)’와 ‘만기지가(萬幾之暇)’라는 호는 만 가지 일을 하는 중에 잠깐의 짬을 낸다는 뜻으로 할 일이 많은 때이라도 글을 읽고 학문을 닦는 것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담은 호이다.


‘정조 예술을 펼치다’의 작품들을 보면 정조대왕의 시와 글, 그림에는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 그리고 신하들에 대한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전시물들 중에서 정조대왕께서 쓰신 한글 편지를 보고 정조대왕께서도 한글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 놀라웠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글 소설전을 관람했는데, 과연 정조대왕께서도 이러한 한글 소설을 읽으셨을지 궁금했다.

정조대왕은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늘 바른 마음으로 바른 정치를 하려한 정조대왕의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개혁과 지극한 효성으로 많이 알려졌던 정조대왕에 대해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하였다.

어쩌면 조선의 왕 들 중에 가장 예술을 사랑하고 시와 글, 그림에 뛰어난 왕은 정조대왕이 아닐까?

 
 

 

이예은 독자 (동학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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