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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11월 5일

문화속으로 추천 리스트 프린트

이예은 독자 (동학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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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고 위엄 있는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

지난 10월 10일, 수원시 승격 60주년 축하 시민퍼레이드와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가 있었다. 오후 2시부터 시민퍼레이드가 먼저 시작되었는데 여러 참여 단체들이 각각의 주제로 참가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기대하던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가 시작되었다.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는 정조대왕 시절의 모습을 고증을 통해 재현하였는데, 시간을 거스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조대왕은 1789년에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지금의 화성시)으로 이장하여 현륭원이라 칭하고 해마다 1월 혹은 2월에 현륭원을 참배하였다. 왕의 궁 밖 나들이를 ‘거둥’ 혹은 ‘행행’이라 하는데, 능에 가는 행행을 능행, 원(왕의 후궁이나 세자의 무덤)에 가는 행행을 원행이라고 한다. 장헌세자는 왕이 아닌 세자의 신분이었으므로 정조대왕 당시에는 현륭원 방문을 ‘원행’이라 하였다.

정조대왕은 어느 임금보다도 궁 밖 나들이가 많은 임금이셨다. 국왕의 능행이나 원행은 2년에 1회 혹은 2회가 보통이지만, 정조대왕은 재위 24년간 66회의 행행을 하여 1년 평균 약 3회를 기록했고, 아버지 묘소 참배가 그 절반을 차지했으며, 화성행차는 13회였다.

정조대왕께서는 행행 중에 3,355건의 상언이나 격쟁을 처리하셨다. 한 번 행차 중에 평균 51건의 민원을 처리하신 것이다. 상언이란 백성들이 임금을 직접 만나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행차 중에 징을 치고 나와서 왕에게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이다.


원행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는데,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기 위해 길을 닦고 다리를 건설 혹은 보수해 치도의 효과가 있다. 또한, 많은 군사들을 데리고 가면서 수도권의 방위체제를 점검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셨다.


이밖에도 현지에 가서 별시를 시행하여 지방의 인재들을 수시로 발탁하여 등용하였으며 행차 중에 혹은 행차를 마치고 돌아와서 많은 신료와 군사들에게 상을 내려 사기를 진작시키셨다.


1795년(정조 19년)의 현륭원 방문은 각별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해가 을묘년이므로 ‘을묘원행’이라고 불리는 이 행차는 겉으로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경축하기 위한 나들이였다. 그러나 정조가 8일간의 화성행차에서 벌인 행사들은 단순한 회갑잔치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작게는 어머니의 한을 풀어 주는 효성의 표현이지만, 크게 보면 자신이 재위 20년간 쌓아 놓은 위업을 과시하고, 내외 신민의 충성을 결집시켜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거대한 정치적 시위이기도 하였다. (정조대왕 능행차연시 체험 리플렛 참고)

가을의 맑은 햇살 아래 취타대, 경기감사, 훈련대장, 총리대신, 정조대왕, 혜경궁 홍씨, 정리사, 청선군주, 장용대장, 도승지, 장용영제조 등이 화려한 복장으로 당당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에 외국인들도 당시의 복장으로 참여하는 것을 보니 세계인이 정조대왕의 능행을 따라오는 것 같았다. 외국인들과 밝은 표정으로 함께 웃으며 인사를 나누다 보니 우리의 문화를 함께 체험한다는 생각이 들어 친근하게 느껴졌다.


수원시 승격 60주년 축하 시민퍼레이드와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는 수원이 시 승격을 한 지 60년이 되는 퍼레이드를 보여주어 더욱 뜻 깊었고, 정조대왕 능행차 연시는 정조대왕과 혜경궁 홍씨를 만나는 역사 여행을 하게 하였다.

이예은 독자 (동학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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