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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호 1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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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원 독자 (서울신림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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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 의사 이야기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 러시아 군악대의 요란한 음악소리를 뚫고 6발의 총성이 울린다. 안중근 의사가 러시아 의장대 쪽으로 걸어가 5m(10보)정도에 거리에서 브라우닝 권총 3발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인 관리를 저격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기차 특실로 옮겨 졌으나, 저격 30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체포되었고 함께 거사를 준비했던 우덕순, 조두순 유동하도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어 2월 7~ 14일 관동도독부 고등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판사, 검사, 변호사 할 것 없이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법원에서 6차례 공판을 벌인 후, 일본 헌법을 적용. 안중근 의사는 사형, 우덕순 3년형,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안중근 의사는 감옥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완성하였다. 바로 << 안응칠 역사 >> 이다. "1879년 기묘년 7월 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나니...."로 시작하는 <<안응칠 역사>>에는 출생부터 의병 활동,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이후 안중근 의사는 <<동양 평화론>>을 집필하였으나 완성하기 전 사형 집행이 이루어져 머리말과 제 1장의 일부 밖에 쓰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집행 2일 전, 홍석구 신부와 두 동생들을 만나 유언을 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이틀 후, 예정대로 안중근 의사에 사형 집행이 진행됬다. 형집행 후, 뤼순 감옥 간수는 안중근 의사의 시체를 감옥 뒷산에 묻는다. 36년 후, 그의 조국은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누리었다. 그러나 그의 시체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효창공원에는 1947년 돌아온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가 묻혀있는 삼의사 묘역에는 비석이 없는 하나의 빈묘가 있다. 그 무덤은 시체를 곧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만들어 놓은 안중근 의사의 것이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에 시체를 찾기도 전에 백범 김구 선생 역시 안두희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의거 100주년, 여전히 안중근 의사에 시체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위치조차 찾지 못했다. 해방 이후 남북한은 안중근 의사에 유해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성과 없이 끝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뤼순감옥 뒷산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을 마지막 기회 일지도 모른다.

김준원 독자 (서울신림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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