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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호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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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인 나누리기자 (서울가주초등학교 / 6학년)

추천 : 108 / 조회수 :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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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

조선의 보물창고 였던 규장각은 정조가 왕이 된 뒤에 창덕궁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곳에 2층 건물을 지었는데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문과 벽을 만들지 않게 자연과 어울리는 집을 지었는데 1층은 역대 왕들이 직접 지은 글이나 왕이 쓴 글씨를 보관했고 2층에는 학자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었다.


10월 푸른누리 우수기자가 되어 <왕실 도서관 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찾기-조선 시대의 놀라운 기록문화> 도서를 받았다. 책과 함께 어린이 출판사의 신병주, 이혜숙 글로 엮인 어린이 교양 역사책이다.


조선의 보물창고였던 규장각은 정조가 왕이 된 뒤에 창덕궁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답고 한적한 곳에 2층 건물을 지은 것이다.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문과 벽을 만들지 않게 자연과 어울리는 집을 지었다. 1층은 역대 왕들이 직접 지은 글이나 왕이 쓴 글씨를 보관했고 2층에는 학자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었다. 정조가 얼마나 이 규장각을 아꼈냐하면 절대로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않고 공적인 일이 아니면 마루도 내려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규장각에서 공부하는 학자가 아니면 아무리 높은 관리도 규장각에 들어 갈 수 없고 옷차림도 단정하게 하라고 했을 정도로 규장각의 학자들을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

정조는 젊고 능력이 있는 인재라면 신분을 가리지 않고 규장각 학자로 만들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도 모두 규장각에서 정조와 함께 공부를 한 인재들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역사속의 가슴 아픈 사도 세자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지 못하고 뒤주에 갇혀 아버지가 죽게 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사도 세자의 아들 즉 죄인의 아들이라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어서 힘들었다. 그 때 장용영이라는 신하가 규장각을 지어 인재를 모으고 왕을 지켜주는 군대로 새로 만들자고 해서 규장각이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이었다.


나라의 일도 연구하는 중요한 곳으로 정조는 꿈꾸는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 나갔다. 그에게는 학문을 바탕으로 살기 좋은 조선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었다. 왕위에 있는 24년 동안 규장각의 학자들과 함께 151종류의 3960권의 책을 만들었다. 얼마나 열심히 학문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규장각에는 중국이나 외국의 귀한 책들을 모아 보관을 해서 규장각을 조선의 보물 창고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가 죽은 뒤 자료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했다. 조선 후기 고종이 규장각을 다시 되살리려고 했지만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뺏기면서 규장각이 사라지게 되었다. 일본이 규장각을 없애버리고 그 곳에 있던 책들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겼다. 1945년 해방 후 일본이 물러가자 규장각의 책들을 경성제국대학이 아닌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옮겨진 것이다.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라를 잃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1992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라고 건물을 지었는데 다시 2006년에는 우리나라의 역사, 정치, 문화 등 여러 가지 학문을 연구하는 기능이 함께 해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규장각안에는 왕이 쓴 글씨와 기록화를 볼 수 있는데 왕이 쓴 글을 ‘어필’이라고 한다. 영조와 사도 세자가 쓴 군신유의도 있다. 그리고 선조가 그린 난초와 대나무 숙종이 아들인 영조에게 쓴 편지와 흥성대원군의 추사체 글 등도 있다. 왕후가 쓴 한글 편지도 함께 보존되어 있다.


초상화도 있었다. 정조가 아꼈던 유언호의 초상화는 당시 최고의 이명기 화가가 비단에 그렸고 정조가 유언호에세 칭찬하는 글도 함께 담겨 있다. 규장각을 만들 때에도 가장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아꼈던 것 같다. 조선 시대의 초상화에 나라에 공을 세운 공신, 승려, 사대부의 양반, 부부들까지 다양하게 그렸다. 초상화는 진짜 얼굴처럼 그린 것이었다. 거기다가 수염 한 오라기, 흉터 자국, 코가 빨간 것까지 그대로 그렸다고 한다. 마치 사진처럼 그렸는데 초상화 속에 그 사람의 특징이나 성격을 정확하게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성격이 어떤지를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들이 요즘 사진을 찍고 나면 컴퓨터로 포토샵이나 점도 지우고 예쁘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임진왜란을 기억하라>에서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라, 라는 큰 뜻이 숨겨있다. 임진왜란 때 치열하게 싸운 모습을 그대로 그린 이시눌의 <임진전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정발의 첩인 애향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부분도 그림으로 그렸다. 조선시대의 여인들이 목숨을 걸고서도 자신의 몸을 지켰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임진전란도는 240년이 지난 위에 전쟁을 그림으로 그렸다. 왜냐면 언제 또 이런 큰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항상 경계하라는 뜻과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후세에 남겨 본보기로 하기 위해서였다.


나라의 잔치도 그림으로 남겼는데 이렇게 좋은 잔칫날들을 사진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림으로 남겨서 자랑스러운 모습을 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라에 어려운 일만 아니라 이렇게 좋은 일도 있어서 잔치도 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니 보는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도 조선의 왕도 그림을 보면서 아주 흐뭇해 하셨을 것 같다.

왕실 기록의 꽃이라 하면 바로 의궤를 들 수 있는데 규장각 유물 중에 가장 많이 알려졌다. 또 귀한 자료로 왕실의 다채로운 행사가 그림으로 나와 있다. 그 때의 왕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알 수 있어 아주 귀한 자료로 우리들이 지금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의궤는 나라에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들었다. 지금 남아있는 의궤는 모두 1600년대에 만든 것들뿐이다. 왜냐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안타깝게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왕실 행사를 그린 의궤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조선에만 있는 특별한 전통으로 2006년에 유네스코에 세계 기록유산으로 인정해달라고 신청을 했다. 그래서 2007년 6월 14일에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어 전 세계가 함께 보호하고 인정받는 것이 되었다.

우리에게 아주 유명한 정조의 화성 행차를 담은 반차도는 ‘원행을묘정리의궤’로 조선시대 의궤에도 으뜸으로 꼽히고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에 다녀온 기록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김홍도가 전체 책임을 맡았고 많은 화가들이 참여해서 그렸다고 한다. 화성 행차 8일 동안의 기록이니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우리가 의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도와 지리지도 함께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도고 있어서 조선 시대의 사람들도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얼마나 많았는지 잘 알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로 우리나라 지도를 아주 크게 그려져 있고 유럽과 아프리카 등 인도까지 그려서 지금의 세계 지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


<천하도지도>는 둥근 지구본 모양인데 세계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지도로 조선에도 들어 왔기 때문이다. 또한 국경을 꼼꼼하게 그린 <요계관방지도>가 있다. 국경을 지키기 위해 요새 중심으로 그린 것으로 지도에 표시만 보아도 그 요새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나라를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숙종의 뜻으로 이이명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청나라의 지도를 틈틈이 모아서 숙종에게 바친 요계관방지도는 청나라를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인조가 청나라의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수모를 겪었다. 또,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수만 명이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숙종은 지도 사업에 많은 정성을 쏟았다. 이 모든 것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지의 결과이다.


우리의 전통만이 아니라 세계의 만남으로도 노력을 했는데 조선은 외국어도 배우고 먼 길을 떠나서 낯선 나라와의 교류에도 힘썼다. 몽골어는 빨리 배우기 위한 <노걸대>와 일본어 빨리 배우기의 <첩해신어>, 중국어를 배울 수 있는 <박통사> 등으로 역관을 교육 시켰다. 지금처럼 외국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베스트셀러인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쓴 글이다. 백성들의 생활상을 그대도 쓰기도 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베껴서 읽고 또 턱이 빠질 정도로 웃게 만들었다고 한다. 양반들은 양반들을 꾸짖는 글이 많아 싫어했고 정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이 책을 보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지원이 떠난 뒤 80년이 지난 뒤에는 널리 읽히게 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 한 바퀴라는 내용으로 세계를 일주한 이야기책도 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파견된 민영환 일행의 개행문인 <부아기정>은 고종이 러시아와의 외교를 위해서 보내게 되었다. 민영환 일행은 긴 여행을 하면서 낯선 나라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을 했다. 7개월 동안 11개국(중국, 캐나다, 아메리카대륙,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이나 다닌 이야기를 통해서 조선이 세계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권의 책에서 만난 왕실 도서관은 조선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똑똑한 조상님들의 기록문화로 우리가 지금도 오래된 역사를 바로 알 수 있고 좋은 점도 본받아서 너무 좋다. 우리도 지금의 기록을 잘 남겨서 똑똑한 조상으로 남아야겠다.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푸른누리 우수기자로 선물로 받아 읽게 되어 더 뜻 깊었다.

정혜인 나누리기자 (서울가주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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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사라
오산초등학교 / 5학년
2012-01-28 19:23:47
| 우수기자 도서로 선물받았는데 아직 다 읽어보질 못했어요. 책을 읽기전 도움받고 갑니다.
이지은
벌말초등학교 / 6학년
2012-01-29 15:31:41
| 저도 우수기자 도서로 받았어요. 5학년 사회에서 배우는 규장각의 내용이 담겨있어서 더 더욱 잘 읽어보았었는데, 참 좋은 책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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