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 교장(안양신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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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3월 1일 나는 대한민국의 서남쪽 끝과 제주도의 중간지점에 있는 독거도라는 섬에서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부부 교사를 하며 신혼생활을 하였다. 내가 원하여 어마어마한 경쟁을 뚫고 부임하였지만 섬 생활이 너무 힘들어 교사를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에 갈등을 느끼고 있는 초여름 어느 날 저녁때 일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에 밖에 나가 보니 검정 비닐봉지를 내밀고는 내가 받자마자 모두들 멀리 달려가는 것이었다. 의아스러워 비닐봉지를 열어 보니 처음 보는 작은 알갱이의 검정 열매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 작은 알갱이가 나와 우리 독거도 아이들의 사랑의 씨앗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아니하고 군것질 거리가 없는 섬마을에서 신혼부부는 심심풀이로 달콤새큼함과 아이들의 사랑을 하얀 이빨과 불그스름한 입술이 새까맣게 염색되는 줄도 모르고 흠뻑 음미하였다.
우리 섬마을 아이들은 매일 공부가 끝나면 집에서 키우는 소를 몰고 나지막한 산이지만 그곳에 올라가서 땅거미가 쪽빛 바다에 검정색을 칠 할 때까지 소를 돌보며 지낸다. 16명의 고사리 손으로 모아서 선물한 정금이라는 검정색 작은 알갱이 열매 1봉지는 폐쇄된 공간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던 우리 부부교사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그 다음날부터 우리 부부도 그들과 소를 먹이는 목동이 되어 바위에 앉아 기타를 치며 그들과 노래 부르며 게임하며 이야기하는 목동 생활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 우리 목동들은 엉뚱하게도 16명의 단체 자장면 먹기 위한 섬마을 탈출이라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작전 내용은 나는 경비를 책임지고 나의 아내인 여자 선생님은 아이들의 언어와 용모에 대하여 세련되도록 다듬어 가는 것이며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을 많이 읽어 섬마을 어린이들도 교양이 있고 공부 잘한다는 부끄럼 없는 아이들이 되기로 약속하였다. 그 기념으로 우리 목동들은 섬마을 선생님 노래를 기타와 함께 힘차게 기쁘게 노래하였다. 그런데 단지 이야기로 끝이 날것이라는 그 꿈같은 일이 27일 만에 실현되고 말았다. 광주에 있는 지인들이 활동을 한 결과 광주국세청에서 우리 학생 16명 전원을 광주로 3박4일 초청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그 날부터 여름방학이 되기까지 1개월 동안 우리 아이들은 자장면과 육지 구경의 꿈에 부풀고 도시에 가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이야기들이 소먹이는 야외 학습장 바위 위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남자 아이들은 내가 기계를 사다 머리를 깎아 주었고 여자 아이들은 여자선생님 새댁이 미장원 다니던 기억으로 가위질을 하였다. 도시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비하여 츄리닝을 장만하여 ‘독거분교 꿈 어린이’이름을 새기고 외출복으로 대신하였다. 우스꽝스런 복장이지만 그 시절엔 츄리닝 입어 보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우리들의 멋진 여름방학 섬마을 탈피의 행각은 시작되었고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목욕탕 사건이었다. 목욕탕을 사용한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바다에서 헤엄치고 노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이었다. 여자선생님의 여탕은 순조로웠는데 남탕에서 호통 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아이들만 들여 보내 놓고 나는 탈의실에서 열차표와 일정을 체크하고 있었는데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바다에서 수영하던 솜씨가 여지없이 발현되고 말았다. 뛰어 내리는 아이, 물장구 치는 아이, 잠수 하는 아이 목욕탕이 엉망이 되어 모든 분들에게 사죄드리고 내가 같이 합세하여 줄을 세워놓고 때를 벗기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영화에서 본 독일의 포로 수용소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가서 웃음띤 얼굴로 다독거리며 혼란의 1라운드를 마쳤다.
그리고 우리는 광주행 열차를 타고 광주를 도착하여 국세청에서 준비해 주신 승용차를 타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신발을 벗는 것이 아닌가. 그림책에서 보았던 처음 타 보는 여객선, 기차에서 이제는 승용차까지 낯선 아이들인지라 승용차 바닥이 깨끗하니 당연히 신발을 벗고 타는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차가 멈추고 신발이라야 타이어 고무신 신발이지만 다시 신고 국세청장님과 만나게 되었다. 모든 의식이 끝나고 저녁 식사는 내가 요구했던 중국식당에서 환영의 만찬을 하였다. 광주에서 제일 유명한 중국식당의 코스요리가 나왔으며 그 날 저녁 배탈이 난 아이들이 3명이 발생하였다. 3박4일 동안 너무나 신기한 거리의 모습에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더디었지만 우리 아이들은 자동차 공장, 기계공장, 어린이 공원, 박물관, 방송국, 도교육청, 도청, 군부대, 초등학교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방문하였고 많은 선물을 가득안고 섬마을로 돌아왔다.
그 아이들 중 광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아이도 있다. 돌아온 후에는 날마다 이야기가 끝이 없고 선물로 받아온 동화책을 다 닳도록 읽는 모습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여행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다시 배우게 되었다. 아이들이 의젓하여졌고 무엇이든 세심히 관찰하며 다양한 각도로 생각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으며 자신들의 꿈에 대하여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아이들의 소원인 전기 때문에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우리 섬마을 주민들의 힘으로 전기를 자가 발전하여 학교는 물론, 야간 작업을 하는 작업장과 28호의 가정집에 3등씩 전기를 공급하였으며 각 집에서는 tv시청이 가능하였다. 전기 시설 공사는 선생님의 지도로 학생들, 동네 주민들이 함께 시공하였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일명 독거분교 전기 회사는 전국으로 방송되었다.
까만 열매 한 봉지의 정성어린 마음이 도시 여행, 전기공사까지 어마어마한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진솔한 사랑의 힘은 너무 위대하다. 그 아이들은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가끔 만나고 있으니 세월이 그토록 빨리 스쳐 지나가버렸다. 내가 섬마을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지금 여러분이 얼마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여행과 새로운 체험은 여러분의 운명을 더욱 행복하게 하는 보약이며, 꿈을 이루려는 노력은 결국 내가 이웃과 진솔한 나눔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방학에는 영어, 수학도 중요하지만,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 생각해 보기, 봉사 활동, 여행, 다양한 체험을 하여야 하며, 특히 이웃과 소통하고 배려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여러분 행복한 여름 방학 보내셔요.
박동호 교장(안양신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