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연 독자 (대전샘머리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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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세 번째 탐방이다. 두 번의 탐방은 대전 근처에서 했다. 대전과 충남지역을 벗어난 탐방은 처음이다. 그래서 더욱 설레고 기다려졌다. 현장체험학습신청서를 낼 때 담임선생님께서도 종묘와 조선왕릉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와서 수업시간에 친구들에게 발표를 하라고 하셨다.
아침 일찍 서둘러 대전역으로 갔다. 서울역에서 모이는 시간이 9시20분이라 8시10분 KTX를 탔다. 대전역에서 5분 정도 늦게 출발을 해서 서울역 집합 장소에는 겨우 시간을 맞추어 도착했다. 도착 후 출석 체크를 하고 아직까지 푸른누리 기자 모자를 받지 못한 기자들에게 모자를 나누어 주었다. 나도 기자 모자를 받았다. 이제 정말 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울역으로 오기로 한 기자들이 모두 도착하자 버스를 탔다. 엄마와도 작별 인사를 했다.
- 종묘에 대하여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종묘였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 (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우리들이 도착했을 때 ‘종묘 전알봉심례 재현행사’를 시작했다. “정조 임금, 친히 종묘를 살피다”라는 주제로 종묘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에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며 조선왕조의 상징적인 공간인 ‘종묘’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문헌기록에 근거하여 재현행사로 복원한 것이다. ‘전알봉심례’에서 ‘전알’이란 ‘전배(展拜)’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국왕이 종묘나 왕릉에 참배하던 의식이며 ‘봉심’은 국왕의 명을 받들어 종묘나 왕릉을 살펴보는 일을 말한다.
정조 임금에 대한 이야기는 TV에서 ‘이산’이라는 제목으로 사극을 할 때 너무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어서 더욱 관심 있게 보았다. 이산(정조대왕)의 업적은 첫째,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물제도를 정비 작업이 완료되어 그 결과물로 『속오례의』,『증보동국문헌비고』『국조보감』,『대전통편』,『문원보불』,『동문휘고』,『규장전운』,『오륜행실』등을 편찬했다. 둘째,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학이 발달하게 했다. 셋째,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조선시대 최대의 문예 부흥기를 이루도록 했다. 넷째,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였다. 다섯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강화에 힘썼을 뿐 아니라 영조의 탕평책 계승, 파당을 배격하고 조선후기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루고 규장각 인재를 통하여 혁신청치를 펼치며 선진 문화를 마련했다고 하겠다.
부모님께서는 정조 임금이 10년만 더 정치를 하셨다면 우리나라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하셨다. 항상 백성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임금, 신분을 따지지 않고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는 임금, 후세를 위해 사소한 것이라도 정리하고 기록하여 책으로 남기는 임금,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임금이라고 하셨다. 그런 말씀을 듣고 본 행사라 더욱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행사 진행 과정을 사진에 자세히 담았다. ‘전알(국궁사배)’ 장면에서는 내가 마치 정조 임금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절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5월2일에는 정전과 영녕전에서 종묘대제가 있다고 한다. 종묘제례 봉행, 종묘제례악 및 일무를 재현한다고 한다. 그때 관심 있는 푸른누리 기자들이 참석하여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을 직접 체험해 보길 기대한다.
- 조선왕릉에 대하여
종묘를 나와 태릉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태릉에 도착한 후 도시락을 먹었다. 점심식사 후에 동영상으로 만들어진 왕릉이 만들어진 순서를 보았다. 그리고 ‘조선왕릉 전시관’에서 왕릉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작년 겨울 경주에 갔을 때 ‘천마총’에서 신라시대 임금의 무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왕릉을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동구릉에 갔다. 그곳에서는 계속 걸어가다 홍살문에서 서서 설명을 듣고 정자각 옆에 있는 계단에서 신이 올라가는 계단과 왕이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도 설명해 주셨다.
탐방에 참여하지 못한 푸른누리 기자와 독자들에게 왕릉을 어떻게 하면 쉽게 설명해 줄까 고민을 하다가 아빠와 함께 사진을 편집했다. 내가 동구릉에서 찍은 건원릉 사진에 풍선 모양의 설명을 넣었다.
조선시대 능역의 공간 구성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3단계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재실 등이 있는 진입 공간은 산 자의 공간이고,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 수복방, 수라간이 배치된 곳은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성과 속의 공간이다. 그리고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공간은 곧 성역의 공간이다.
왕릉에 들머리에는 재실이 있고, 재실을 지나 능력에 들어서면 왕릉으로 들어가는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를 건넌다. 사진에서는 재실과 금천교는 이전에 있는 곳이라 나타나지 않았다. 금천교를 건너면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있다. 결국 금천교를 지나서부터가 왕릉이라고 보면 된다. 홍천문은 절을 다닐 때 볼 수 있는 일주문과 같은 의미로 보면 된다. 절을 마친 왕은 홍살문을 통하여 정자각에 이른다.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참도라는 돌길이 있다. 참도는 신도와 어도로 나눈다. 왼쪽의 신도는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서 오른쪽 어도 보다 약간 높고 넓다. 어도는 제사를 모시는 왕이 다니는 길이다. 결국 산 자와 죽은 자가 다니는 길을 구분하고 있다.
정자각의 양 옆으로는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는 등의 제례 준비 공간인 수라방과 능침을 지키는 사람의 공간인 수복방이 설치되어 있다. 제례 의식을 마치는 정자각의 서북쪽으로는 지방을 불태우는 소전대와 제물을 태워 묻는 예감이 배치되어 있다. 한편 정자각의 열린 후문으로 나오면, 왕의 혼령이 제향 후 봉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앞쪽에서 이어진 신도가 짧게나마 계속 된다. 이밖에 왕의 업적을 나타내는 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정자각 뒤쪽으로는 작은 동산 모양의 사초지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조선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탐방에 참여한 기자들은 정자각까지 밖에 갈 수 없었다. 세계문화유산이기 때문에 봉분이 있는 곳은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분 주변의 장대석을 비롯한 석상들은 직접 촬영을 하지 못해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에 가면 왕릉별로 홈페이지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동구릉을 마지막으로 조성왕릉 탐방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후 처음 출발 장소인 서울역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모든 탐방을 무사히 마치고 대전으로 오는 KTX를 타고 엄마께 오늘 탐방에 대한 느낌을 말씀드렸다. 역시 경험만큼 좋은 공부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양한 탐방에 참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푸른누리 기자와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드리고 싶다. 비록 탐방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찾아보면서 기자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해 보았으면 한다. 종묘는 사적이고, 종묘에 있는 정전은 국보이며, 영녕전은 보물이다. 그리고 조선왕릉은 사적이다. 그럼 사적과 보물, 국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박소연 독자 (대전샘머리초등학교 / 5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