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독자 (대구대진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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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6일 기쁨을 억누르며 나는 조선 왕릉 탐방을 위해 서울로 향했다. 처음으로 탐방 취재를 가는 길이라 많이 설렜다. 하지만 한편으로 기쁘기도 했다. 집결지인 서울역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몇몇의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첫 번째로 종묘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처음에는 그저 설레기만 해서 몰랐는데 많은 기자들과 종묘를 보니 내가 탐방취재를 하러 왔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종묘는 추존된 왕과 왕비를 포함한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조선시대 사당이다. 또 한옥의 특정구조를 이용하여 조립식으로 한 칸의 방을 계속 이어나가는 동당이실의 형태로 되어있다.
경복궁이 우리나라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라면 종묘는 비교적 소박하고 단출하다. 흔히 다른 궁궐에서 쓰는 팔작지붕 대신 맞배지붕을 쓰고 문의 색도 단순하다. 하지만 종묘는 1995년 창덕궁 조선왕릉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돌아가신 왕과 왕비의 영혼을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또 다른 특징은 정전으로 가는 길이 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굽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조상을 기리는 시간을 좀 더 길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단일 건물이다. 원래의 종묘는 현재와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다른 곳의 평지보다 더 높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신적 문화인 종묘의 앞을 매워 버림으로써 국민들의 정신적인 맥을 끊어 버린 것이다. 순간 일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났지만 다시 보수 공사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다음은 조선왕릉 전시관에 갔다. 이곳에는 왕이 죽고 나서 왕릉에 모셔지기까지의 국장절차 등을 보여주고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장례준비기간이 약 27개월 정도라는 것이다. 27개월이라면 2년하고도 3개월 정도이다. 이 긴 시간 동안 모두 왕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을 보니 내심 왕의 권위를 느낄 수 있었다. 조선 초에는 석실을 썼는데 석실은 못을 쓰지 않고 철제고리를 사용했고 미닫이형식 돌문으로 막고 사방에 사신도를 그리는 등 독특한 사항이 많았다. 그러나 석실을 만들기는 백성들의 노고가 늘어나서 회 와 숯을 넣는 방식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왕릉은 독특한 무덤 모양을 갖추고 있는 곳이 있는데 예로 현릉은 같은 언덕에 두 개의 무덤이 있는 형식이다. 왕릉은 항상 왕이 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가끔 신하들이 와서 지내기도 했는데 왕이 직접 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친향례라고 하고 신하들이 대신 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섭행이라고 한다. 또 배위에 있는 돌은 국궁사배를 하는 곳으로 오직 왕 만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었다.
조선왕릉은 북한을 포함하여 총 44기가 있는데 이 44기가 모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왕릉은 모두 한 번 씩 도굴을 당하기 마련인데 어떻게 조선왕릉은 도굴을 당하지 않았 까. 석실, 회 사용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왕릉에 들어가는 모든 부장품들이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대부분의 왕릉들은 중요한 귀금속, 유품 들을 넣기 때문에 도굴을 당하기 쉽다. 그러나 조선왕릉은 모조품을 넣기 때문에 도굴 당할 이유가 없다. 다른 왕들은 죽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사후세계 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귀금속을 넣었지만 조선시대 왕들은 죽어서는 비움을 실천했다. 그래서 온전하게 보존된 것을 보면 역사는 아이러니한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종묘와 조선왕릉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왕의 신주를 모시고 왕의 무덤이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조상의 영혼을 기리고 백성을 위한 배려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정말 유익하고 재미있던 탐방이었다.
김정은 독자 (대구대진초등학교 / 6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