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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09월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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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독자 (서울탑산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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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수 도편수님과 문화재복원을 논하다

시공을 넘나드는 신의 손 - 이시대 최고의 도편수 ‘신응수’

9월 6일 월요일 12시 20분. 4교시 수업을 마치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 조퇴를 하고 집으로 달려갔던 이유는 오후 3시에 그토록 기다리던 신응수 도편수님과의 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분인데 어떤 분이실까? 인자하실까? 시골에서 태어나셨다고 들었는데 사투리는 쓰실까?’ 내 머릿 속은 신응수 도편수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매워져 있어 다른 것을 생각할 틈도 없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신응수 도편수님께 드릴 질문을 외우고 다른 기자들의 질문도 보며 일찌감치 출발을 한 덕분에 국립고궁박물관에 도착해 차분히 인터뷰 내용을 점검했다.


인터뷰를 위한 푸른누리 10명의 기자들과 함께 편집진 선생님들의 간단한 당부 사항을 듣고 경복궁 내 동궁으로 향했다. 동궁에는 자선당과 비현각이 있는데 우리 푸른누리 기자들은 자선당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평소엔 감히 엄두도 못 낼 이 귀한 궁궐 내 자선당에서 편안히 앉아 우리나라 최고의 대목장 신응수 도편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겉으로는 당당하게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너무도 떨렸는데 수 많은 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듯 그런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선당에 들어서니 신응수 도편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인자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우리 10명의 기자들은 간단히 인사를 마친 후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신응수 도편수님은 대한민국 최고의 목수로 문화재 복원 전문가 대목장으로 더 유명한 분이시다.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소유자로 선정되신 인물로 그간 이 분의 손길을 거친 문화재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문화재가 신응수 도편수님에 의해 복원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궁무진하다. 조선의 궁궐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복궁은 물론 지난 번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인해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숭례문, 정조 임금의 효 사상이 어린 조선시대 성곽의 꽃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 또한 이 분에 의해 복원되었다. 특히 이 수원 화성은 거중기를 비롯한 목도 등 옛 우리 선조의 건축 방식을 그대로 이어 복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년의 역사 신라의 유적 경주의 안압지는 물론 불국사, 제주 목관아, 관영건축, 단양의 구인사외 여러 사찰들의 복원을 하면서 시대를 넘나드는 신의 손이 되어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계시다. 늘 우리의 한옥과 함께 하시는 신응수 도편수님과 경복궁 내 자선당에서 귀한 시간을 가졌다.

‘할아버지’라 말씀하시는 자상함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라시며 가난하게 지내셨다는 신응수 도편수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시절부터 ‘목수’라는 직업을 선택해 대목장이 되기 위해 꿈을 키우셨냐는 김미리 기자의 질문이 있었다. 신응수 도편수님이 기자의 질문에 답해주실 때 ‘할아버지가’ 라고 말씀하셔서 우리가 마치 손자, 손녀가 된 것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신응수 도편수님은 처음부터 꿈이 대목장은 아니었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태어나 어렵게 생활했던 터라 ‘꿈’을 가진다는 것은 실질적인 생활과 거리가 멀기에 생계를 위한 취직자리를 얻기 위해 일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목수인 사촌 형을 따라 집 짓는 일을 도우면서 지금의 ‘목수’가 되셨다고 한다.


"장인들은 속이면 안 되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할아버지란 친근한 말과 함께 기자가 자기소개를 하자 다니는 학교가 서울에 있냐며 자상한 관심까지 보여주셨다. 이어진 김민수 기자의 질문 중 우리나라 최고의 대목장으로 불리신다는 말에 최고를 ‘대목장’이라 부르는것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말씀하시며 많은 건축물의 복원과 신축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작업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다. 남들이 최고라고 해서 자신이 그렇게 인식하면 안된다고 말씀하신 신응수 도편수님은 남들이 잘 한다는 말에 도취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며 너무도 겸손한 마음을 보여주셨다. 일에 대한 힘든 점은 참을 수 있지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장인들의 실제 모습과는 달리 해석하며 음해하려 할 땐 마음이 아프신지 그러한 사실을 안타까워하시며 모름지기 "장인들은 속이면 안되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철칙으로 여긴다고 재차 강조하셨다.

인터뷰를 하는 자선당(왕세자가 머물던 곳)을 예로 들면서 집을 짓는 철학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는데 일본 사람들이 건물은 물론 돌까지 다 뜯어갔는데 지진으로 다 타서 돌만 남아 복원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사진이나 자료만 있었더라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지을 수 있었을 텐데 경복궁 내 자선당 또한 다시 지으면서 힘든 점이 많으셨다고 했다. 특히 이 건물을 복원할 때 우리나라 강원도에서 자생하는 커다란 소나무로 기둥을 지었는데 수입송으로 지었다는 음해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하셨다.


광화문의 복원-"복원이라는 말은 엄청나게 힘들다!"

가을이 오는 문턱의 고즈넉한 궁궐에서의 인터뷰는 우리 문화재를 아껴야겠다는 기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함께 시대를 되짚어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 8.15 광복절에 맞춰 광화문 개문식이 이뤄졌는데 우리가 알고 있 듯 총지휘를 하시며 작업에 임하실 때 어떤 마음이셨으며 일반에게 공개될 때의 마음은 어떠한지 묻는 김용준 기자의 질문에는 광화문 복원 공사라는 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만드는 것인데 다행히 사진이 있어 복원 시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후 그 사진 속 건물이 동대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다시 지어야만 했는데 이 때 "복원이라는 말은 엄청나게 힘들다!"고 하시며 측량 시 힘든 점부터 서까래 설계를 예로 드시며 정교한 작업 과정을 설명해 주셨다. 일본인들이 예전 광화문 해체를 하면서 기록해 해 놨던 것을 보면서 측량이 잘못된 부분을 무형문화재 위원들과 분야 별로 합일점을 찾아 총감독을 하는 문화재청과 함께 작업을 한다고 하셨다. 복원 공사라는 것은 쉽게 볼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시며 목재는 물론 돌 하나하나까지 그 당시 성능과 최대한 비슷한 점을 찾아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까지 세심하게 합일점을 찾아 작업을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더불어 우리 일반인들도 광화문 복원 시 사용된 돌과 기둥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생각을 하며 감상했으면 하는 바람을 비추셨는데 순간 마음이 숙연해졌다.


복원-소나무(적송)와 거중기

궁궐 내 거의 모든 건물에 소나무가 왜 쓰여 지냐는 박가연 기자의 질문에는 예로부터 쓰여지는 궁궐 내부의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적송)을 사용한다고 하셨다. 이번 경복궁 복원에도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예로부터 아이를 낳으면 금줄을 치는데 그때도 소나무를 썼던 건 다른 나무와는 달리 쓰러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강한 소나무는 강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장점과 함께 나무를 썪지 않게 하는 송진이 있어 궁궐의 모든 건물에 쓰여졌다고 한다. 이번 근정전엔 오대산에 있는 전나무도 들어갔지만 거의 소나무로 지어졌다고 한다. 물론 일부는 커다란 소나무를 구할 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캐나다에서 수입한 것도 있는데 말씀하시면서 많이 씁쓸해 하셨다.


이어진 송윤아 기자의 질문엔 숭례문 복원 시 거중기를 비롯해 옛 방식대로 작업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여쭙자 송기자가 살고 있는 수원의 장안문(북문)을 예로 드시면서 우리나라엔 큰 문이 서울을 비롯해 네 개씩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문인 것이다. 정조대왕께서 수도를 한양도 수원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기록에 보면 2~3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경복궁도 복원하면서 20년 동안 25% 정도 복원한 것에 비하면 옛날 설계에 의해 고종 임금 땐 3년 만에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니 실로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이 놀라웠다. 1975년 장안문을 복원할 당시 도편수로 있으면서 거중기로 끌어올려 지었는데 숭례문 또한 1962년도 복원 시 부러진 것과 썪은 나무와 파손된 서까래 등을 보수하면서 목도와 거중기로 옛 방식을 고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작업도 거중기를 사용했는데 원래 공법대로 하자고 했지만 숭례문 복원에 혹시나 하는 사고에 대비해 나무를 들고 옮길 때 위험을 막고 최대한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거중기를 위에 고정해서 작업을 할 것 같다고 하셨다.


문화재의 문양과 구조를 빼놓지 않고 복원하는데 특별한 비법이 있냐는 이승재 기자의 질문엔 태백산을 기준으로 해서 동쪽에 있는 나무와 서쪽에 있는 나무를 예로 들며 눈과 비바람을 맞고 이겨낸 나무가 문화재 복원에 쓰여 진다고 하셨다. 복원을 한다는 것은 사진과 자료가 없다고 해서 지었다가 뒤늦게 사진이 발견 되어 해체해서 다시 작업하는 힘든 점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복원이라는 것이 어렵기에 자료나 사진을 가지고 꼼꼼하게 실수 없이 분석하고 지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다고 재차 말씀해 주셨다.


‘한옥’ 자연조건과의 어울림-북촌한옥마을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떨리지만 천천히 또박또박한 어조로 질문을 드렸다.


이지영 기자) "한 인터뷰 기사에서 대목장님께선 현재 아파트에 거주하신다고 들었는데 아직 거주 할 한옥을 짓지 않으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또한 대목장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한옥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습니다."


신응수 도편수님) 한옥이라는 건 자연 조건이 맞아야 한다며 북촌 한옥마을이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한옥이라는 아름다움은 자연적인 것과 맞아야 하는데 지을 터가 없어 10년 전부터 목재소가 있는 강릉에 박물관 부지를 짓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를 했지만 땅을 팔지 않겠다고 번복하는 개인들의 욕심들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신응수 도편수님께선 시.도의 발전을 위한 이익을 져버리는 현실을 많이 안타까워하셨다. 이후 부천과 북촌에 알맞은 터가 있어 한옥을 짓기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 이 또한 같은 이유로 여러 차례 계획이 무산되며 아직도 아름다운 한옥 박물관을 짓지 못하고 계시다고 하셨는데 표정만으로도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오랜 숙원이 되실 만한 가치 있는 일인데 사람들의 작은 욕심 때문에 큰 것을 잃는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 답변이었다. 매번 이 질문에 마음이 아프신지 기자들이 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가장 난감하다고 하시며 많은 생각을 하시는 듯한 모습이 아직도 잔상이 남는다. 하루 빨리 신응수 도편수님의 오랜 숙원인 아름다운 한옥박물관이 지어져 대한민국의 자랑인 한옥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시간이 오길 바란다.


건축과 수학과의 상관관계-"손재주만 있다고 큰 대목이 되는 건 아니다!"

뒤 이어 질문에 들어간 임동빈 기자의 질문엔 건축을 하려면 넓이나 길이 등을 계산할 때가 많아 수학이 중요 할 텐데 대목장님께선 어렸을 때 수학이란 과목을 잘 하셨는지 궁금해 하는 질문엔 건축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말씀하셨다. 남대문 중수 공사 시 도편수 조원재 선생님께서 도면을 그려보라는 말씀과 함께 "손재주만 있다고 큰 대목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다는 일화를 말씀해 주셨는데 수학적 계산이 빨라야 하는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수학이 재미있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면서 수학과 건축과의 상관관계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설계를 하면서 치수나 감각이 아주 중요한데 예전 불국사 작업 시 전자계산기와 얽힌 일화에선 수학이 건축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세계공통어인 영어의 필수성에 대한 말씀도 남기셨는데 그 안에 신응수 도편수님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크신지 알 수 있었다.


이어 멀리 대구에서 올라 온 전현환 기자의 ‘지난 2008년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는데 화재나 재난에 대비해 어떤 방법으로 숭례문 복원을 하시는지? 앞으로 우리나라 옛 건축물들을 잘 보전해야 하는데 어떠한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다’라는 질문엔 당시 화재 사실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가 5시간 동안 불타고 있는 숭례문을 보시면서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말씀하시면서 경회루를 비롯한 국보나 옛 건축물에 설치된 현대적 기계화만 믿어선 절대 안 되고 우리 서로서로가 지킴이가 되어 소중한 문화재를 아껴야 한다고 하셨는데 보기 흉한 현대 기계를 할 수 없이 설치 하지만 기계화 시설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항시 지키는 사람을 상주시켜 개방을 하더라도 반드시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셨다.


"우리 문화재는 아주 소중한 거예요!"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대목장’의 꿈을 지니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을 해 달라는 질문을 던진 하헌우 기자의 질문엔 "문화재는 아주 소중한 거예요!"라고 서두에 말씀하시면서 우리 문화재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다잡아 우리 것을 알고, 남의 나라 것도 받아들이는 게 순리라는 것을 강조하시며 무작정 남의 나라 것만 좋다고 쫓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청와대 대통령 관저를 예로 드시면서 우리나라 소나무로 지어야만 한다는 고집스런 장인 정신과 우리 것의 소중함을 절대 잊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쉬운 우리 문화재 이야기는 약간의 추가 질문으로 이어졌는데 임동빈 기자의 광화문 복원 시 못질을 하지 않고 지었냐고 묻는 추가 질문엔 서까래 걸 적에만 못을 박았는데 서까래를 끼워 가는 방식을 이어가며 현재까지 그대로 해체되었다가 다시 그대로 얻는 못을 전혀 쓰지 않고 끼우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하셨다.


또한 숭례문 복원 모습을 토,일 관람할 수 있게끔 개방해 주신다는 말씀을 하시며 우리 모두가 문화재에 늘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 보며 기록하고, 사진도 찍어 자료를 보관했으면 하는 바램을 비추셨다. 그리고 예전 숭례문 화재 당시 건물에 숨어있는 불길을 찾으셨는지 궁금해 하는 전현환 기자의 질문에 밑에서부터 불을 위로 뿌려 껐으면 좋겠는데 위에서만 뿌려 답답한 마음에 상황실을 찾았는데 손발이 맞지 않는 출입 절차에 막혀 커다란 비극이 일어난 점을 아쉬워 하시며 이런 일이 처음이었기에 지난 잘잘못을 가리기보다 앞으로 전문적인 장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는 귀한 일침을 남기셨다. 장장 한 시간여의 신응수 도편수님과의 인터뷰를 마치며 경복궁 내 자선당에서의 귀한 시간을 마무리를 하는데 바쁘신 와중에 경복궁 관람까지 동참해 주셨다.


복원에 참여하신 ‘근정전-강녕전-경회루’를 돌다.

근정전 앞에서 만난 박종갑 경복궁 관리소장님과 문화해설사 선생님과 함께 ‘근정전’을 중심으로 뜻 깊은 역사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신응수 도편수님께서 복원을 하신 곳이라 더 의미가 있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의 집무실이자 접견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정전은 왕과 나라를 상징하는 얼굴인 만큼 외국 사신을 접견하고 나라의 큰 행사를 치르는 곳이었다고 한다. 옛 부터 우리 조상들이 성스럽게 생각한 홀수 숫자인 7을 근정전 천장에 새겨진 용의 발가락 숫자로 썼다고 한다. 기단에 새겨진 양끝의 동물(청룡, 주작, 백호, 현무)도 설명하시면서 자기 시간대 장소에 자리한 십이지신상에 관한 것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또한 근정전 앞 품계석(문관, 무관)과 3도에 관한 사실도 새삼 되새길 수 있었다. 이어 조선의 임금님이 생활하셨던 ‘강녕전’을 돌아보았는데 왕의 침소이자 생활공간인 이곳에서 식사를 하시며 편안하게 신하들과 담소도 나누는 휴식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에 선조들의 섬세함과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경회루’는 아름다운 연못 안에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사신을 맞이해 연회를 열며 아름다운 주변 경치를 둘러볼 수 있는 풍류의 공간이라는 사실과 함께 땅을 상징하는 바깥의 24개 네모난 기둥과, 하늘을 상징하는 안에 있는 24개의 동그란 기둥이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는 것 또한 우리 선조들의 과학적인 우주관을 엿볼 수 있었기에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렇듯 긴 시간동안 귀한 자리를 허락해 주신 신응수 도편수님께선 직접 집필하신 자전적 이야기 ‘천년 궁궐을 짓는다.’란 도서에 일일이 기자들의 이름까지 적어 서명하시며 선물로 나눠주셨다. 이 귀한 도서와 함께 궁궐 도편수 신응수 선생님의 삶의 지론과 고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공간을 초월한 이 시간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해요 대목장 신응수 도편수님!


이지영 독자 (서울탑산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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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환
대륜중학교 / 1학년
2010-09-17 20:33:38
| 저도 함께 취재를 갔습니다. 모든 기자들에게 친절히 대해 주셔서 마치 대목장님의 손자 손녀가 된것 같았습니다.
이종은
인천조동초등학교 / 6학년
2010-09-18 12:55:55
| 정말 잘썻습니다. 저는 안갔는데,,,,, 안 만나 보아도 대단한 분인지 알거 같네요 ^^
오호균
동경한국학교 / 5학년
2010-09-19 20:03:37
| 저도 일본에 있었지만 숭례문에 불이 났다는 기사를 보고 무척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지영 기자의 기사를 읽고 신응수 도편수님의 장인정신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최시헌
성광중학교 / 2학년
2010-09-24 22:44:36
| 장인 이라는 명칭을 얻으시는 분들은 확실히 다른것 같습니다. 멋진 분의 멋진 인터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진영
장평중학교 / 1학년
2010-09-27 16:49:05
| 남들이 잘한다는 말에 도취되지 말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야한다는 도편수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자세한 기사내용 덕분에 저도 만나뵙고 온 기분이네요.
홍문주
감정중학교 / 2학년
2010-09-29 21:49:47
| 저 역시 남들의 잘한다는 긍정적 칭찬에 도취하여 일을 소홀이 하기 보다는 자신이 해야 하는 임무를 묵묵히 하는 도편수님말씀 확실히 공감이 갑니다. 저는 그날 아쉽게도 가지 못했지만 기사로나마 생생히 읽을 수 있어 탐방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이동준
대구시지초등학교 / 6학년
2010-09-29 23:46:50
| 멋진 인터뷰기사입니다. 문화재 복원이라는 아주 막중한 임무를 멋지게 수행하시는 장인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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