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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현 독자 (대구구암초등학교 /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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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고장 칠곡군을 아시나요?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경북 칠곡군 왜관에 사신다. 왜관은 작은 도시이지만 전쟁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엄마가 정말 좋은 취재가 될 것 같다고 하시며, 왜관으로 가자고 하셨다.

왜관에는 호국의 다리(왜관철교)와 왜관지구 전적기념관, 다부동 전적기념관 등이 있다. 그래서 이번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서 나는 이곳들을 둘러보기 위해 자료를 찾는데 마침 칠곡군청에서 문화유적을 알리기 위해 이곳들을 둘러보며 설명해주시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는 약속을하고 그분을 만나기위해 칠곡군청에 갔는데 과장님과 직원분들이 반겨주시면서 기념품도 주셨다. 견학을 하기 전에 그곳에서 문화유산을 담당하시는 분께 간단히 질문을 드렸다.


왜관에는 왜 이렇게 전쟁의 흔적이 많은가요?

선생님: 왜관은 위치적으로 한국전쟁 때 국토를 지킬 수 있었던 최후의 격전지였어요. 특히 낙동강 전투는 정말 치열하게 격전을 벌인 곳입니다.


어떤 기사를 보니 어느 나라에서도 자기 나라의 전쟁을 기념하는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대해 아픈기억을 되살리며 갈등이나 증오심을 키울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생님: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이념이 다른 남북이 서로 존재하는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동족간의 아픔을 망각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우리 칠곡군에도 왜관전적기념관과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곳은 전우세대가 아닌 그 당시의 아픈 추억을 느끼지 못한 세대들이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또한 반공정신을 키우기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6.25 사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같은 것이 있을까요?
선생님: 6.25사변은 정말 아픈 추억인데 앞으로는 남북간이 화해모드를 통해 서로 무력이 아닌 대화로 잘 풀어 나갔으면 좋겠고 글로벌 시대에 맞춰 발전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성현 어린이와 모든 어린이들이 함께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은말씀을 듣고 나는 가이드 선생님을 만나 우선 제일 가까운 낙동강으로 갔다. 그곳에는 6.25사변 때 끊어진 호국의 다리(왜관철교)가 있다. 이 다리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곳은 원래 1905년 일제가 군용 단선 철도로 개통한 경부선 철도교였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6.25사변이 일어난 그해 8월 3일 밤11시 30분 약 4만 명의 인민군들이 다리 건너까지 내려와 자칫 잘못하면 대구와 부산을 함락시킬 위기에 몰려있었다고한다. 그 당시 대구는 우리나라의 임시수도가 이곳에 있었고 또 공군이 주둔해 있어 대구가 함락이 되면 대한민국이 없어지는 그런 위기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도강을 막기 위해 이 왜관철교 469m길이 중에 63m를 폭발시켜 그들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고한다. 그후 8월 16일 전투기 98대가 26분 동안 90t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융단 폭격이다. 이때, 4만 명의 인민군중 3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불가피하게 피난민들의 희생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다리 곳곳에 폭격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나는 외할머니댁에 갈 때 가끔 이곳을 둘러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께서 "저 다리가 6.25 때 끊어진 다리야"라고 하셔도 그냥 그렇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가까이 와서 이야기를 들으니 슬픈 일을 간직한 다리였다는 것이 정말 마음 아팠다.


다음으로 우리는 왜관지구 전적기념관으로 향했다. 호국의 다리에서 차로 5분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기념관은 규모는 작지만 참전용사 충혼비와 UN군 왜관전승비, 왜관지구 전적비가 있다. 전시관 안에는 전쟁 당시 쓰던 청과 미사일. 군인들이 쓰던 물품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낙동강 일대에서 벌어졌던 작오산 전투 등 격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전투는 왜관 동북쪽 작오산(303m) 에서 대구 서남쪽 20km 지점인 달성군 현풍면 북쪽까지 담당한 미 제1기병사단과 북한군 제3사단, 제105기 갑사단과의 대결이었다. 한 때 대구 북쪽 12km 지점인 315고지가 북한군 1개 대대에 의해 점령되어 대구가 위태로워졌으나 미 제 7기병연대가 이 고지를 탈환하여 피탈 직전의 대구를 구하였다고 한다.

나는 묵념을 하기 위해 왜관지구 전적비 앞에 갔는데 벌써 많은 유치원생들이 벌써 서 있었다. 아이들은 흰국화 한 송이씩을 앞에 올려놓고 묵념을 하는데 유치원 선생님 말씀을 듣고 웃음이 났다. 아이들에게 묵념 소리를 "머리 숙이고 얼음!" 이라고 하셨다. 정말 신기하게도 묵념이 되었다. 너무 귀여웠다. 그렇게 나도 인사를 드리고 다음 코스인 다부동 전적 기념관으로 갔다. 차로 약 20분정도 거리였다.


멀리 다부동 전적기념관이 보였는데 모양이 특이하게 탱크 모양이었다. 도착하니 여기에도 정말 많은 어린이들이 견학을 와 있었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다부동은 마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유학산(839m) 우측으로는 가산(902m)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며 지형상 이 방어선이 돌파되면 10km 남쪽의 도덕산 일대까지 철수가 불가피하여 숙명적으로 격전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국군 제1사단은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여 다부동 일대에 설정된 주저항선에서 대구를 목표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대구를 지켜냈다고 한다. 이곳은 또, 당시 전투에 참여한 구국(救國: 위태로운 나라를 구함) 용사 와 구국 경찰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각비가 있으며, 1994년부터 1997년까지 7차례에 걸쳐 50사단 장병들이 발굴한 유해 259점을 합장한 무명(無名: 이름이 없음) 용사 묘지가 있다.

나는 국군만 전쟁에 나가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 경찰묘비가 있어서 놀랐다. 가이드 선생님께서는 다른 지역에서 경찰들도 피난민들과 같이 피난을 갔지만 여기 다부동은 너무 전쟁이 치열하자 당시 경찰 총수인 조병옥 내무 장관이 "대구를 적에게 내주는 것은 나라를 내주는 것과 같다"며 고귀한 생명을 바치셨다고 했다. 정말 가슴이 뭉클하고 슬펐다.


이렇게 참전용사들은 생명을 바치면서 나라를 위해 힘들게 싸우셨는데 나는 덥다면 투덜댄 것이 부끄러웠다.
또 전적기념관에 전시된 사진속 에는 전쟁 고아도 있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고 휴전상태이다. 전쟁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사실을 너무 잊고 사는것 같다.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외할머니댁으로 갔다.

김성현 독자 (대구구암초등학교 /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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