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진 기자 (언남초등학교 /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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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나는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을 하고 부푼 마음으로 조선왕릉 탐방취재에 동행했다. 집에서 7시쯤 출발하였는데 버스와 지하철은 아침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일어나기 싫어서 이불 속에서 뒤척거렸던 내가 부끄러웠다. 다음부터는 일찍 일어나도록 노력해야겠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편집진님과 다른 푸른누리 기자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출석체크를 하고, 편집진님의 설명을 잠시 들은 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첫 번째로 간 곳은 종묘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사당이라고 한다. 원래 종묘제도는 중국에서 왔다고 하는데 한국의 종묘는 중국과 건축양식도 다르고 태실도 19칸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많다고 한다.(중국의 태실은 9칸임) 또, 서양건축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건축 유형이라고 한다.
종묘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안에는 원이 있고 그 안에 사각형이 있는 특이한 무늬였다.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듯 싶어 한 기자가 물었더니 안내요원 선생님께서 자연(원)과 인공구조물(사각형)이 섞여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무늬를 연못에서 또 보게 되었다. 사각형인 연못 안에 둥근 땅이 있었는데 안내요원 선생님께서 연못은 땅을 가리키고 가운데에 있는 땅은 하늘을 가르킨다고 말씀하셨다. 그 옆에 길이 있었는데 혼이 지나다니는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다니고, 왼쪽에는 세자가, 오른쪽에는 왕과 세자를 제외한 신하들이 지나 다닌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사진을 찍고 있는 사이 다른 기자들은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연못을 보고 난 후 정전으로 이동하였다. 정전은 종묘의 중심건물로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신주가 보관된 정전의 신실에는 큰 업적을 남긴 19위의 왕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 곳에서 옛날에 왕과 신하들의 제례를 재현하고 있어서 볼 수 있었다. 뭔가 엄숙하였는데 항상 정해진 절차를 따라 의식이 행해진다고 한다. 왕은 신하가 일러주는대로 절을 천천히 4번 했는데 우리가 제사지낼 때 2번 하는 것과 달랐다. 이유를 물어 보지 못한 게 아쉽다.
태릉 근처에서 맛있게 도시락을 먹은 후 전시관에 들렀다. 이 전시관에서 석물 복제품도 보았고, 왕릉을 짓는 방법 등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명릉도"라는 지도를 보았는데 이것은 왕릉을 선정할 때 나타내는 지도라고 하셨다. 그리고 석물 복제품은 무덤을 지키는 근위병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다.
세 번째로 간 곳은 동구릉에 있는 한 능이다. 동구릉은 태조의 건원릉부터 경릉까지 9릉 17위의 왕과 왕후릉이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동구릉이라 명명된 것은 철종 6년 8월 26일에 순조의 장남인 수릉을 9번째로 모신 이후부터이다. 작년에 가 본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와 비교하면 훨씬 넓고 위치도 좋은 것 같고, 무엇보다 능이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왕이라 다른 것 같다.
능옆에 호롱불이 있었는데 이것은 "장명등"이라고 하며 조상님께서 편안히 계시라는 의미로 장식 했다고 한다. 사소한 물건 같은 것에도 많은 정성이 깃들여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질문시간이 주어져서 나와 여러 기자들이 몇 가지 여쭈어 보았다.
Q(나):"아빠가 출장길에 김해 수로왕릉을 잠시 들러 산책을 하신 후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1시간 넘게 곯아 떨어지셨다고 합니다. 오래된 왕릉에서 기가 나와 몸 속 나쁜 기운이 빠져나가면 잠이 쏟아진다고 하셨는데 맞는 말인가요?"
A: "그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안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건원릉에서는 휴대폰과 카메라 같은 전자제품 같은 것이 안되는 경우도 있답니다."
아빠가 왕릉을 다녀와서 곯아 떨어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신기했는데 전자제품이 안된다고 하시니까 믿을 수가 없었다. 진짜로 기가 나오는 걸까?
Q(기자1):"묘를 둘러싸고 있는 돌기둥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A: "묘를 지키는 수호신 같은 것입니다."
Q(기자2):"왜 왕실의 능역을 그 당시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킬로미터 밖에서 40킬로미터 안에 두도록 하였습니까?"
A: " (생략) 그 당시에는 왕이 갈 수 있는 곳에 한계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Q(나):"4킬로미터 밖에서 40킬로미터 이내에 왕릉을 둔다고 하였는데 왕릉 지도를 보면 단종의 왕릉(장릉)만은 영월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단종은 세조한테 왕위를 빼았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종이 죽었을 때 능을 안지었는데, 후세들이 무덤을 지은것입니다. (그래서 무덤이 영월에 있는 것입니다.)"
질문시간이 짧아 더 물어보지 못했다. 우리는 능 아래로 내려와서 정자각 근처에 모였다. 안내요원님의 설명도 듣고 QOOK TV에서 인터뷰도 하였다.
Q(QOOK TV): "이곳에 와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A(나):"뭔가 탁 트이는 느낌이 나요. 기분도 좋아지고, 아무튼 뭐가 탁 트인 것 같아요."
인터뷰를 끝으로 조선왕릉 탐방을 모두 마쳤다. 처음으로 그렇게 많이 걸어다녀서 힘들었지만 진짜로 속이 후련해지고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았다. 아빠처럼 나도 왕릉의 기를 받은 걸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녹초가 되어서 금방 잠들어버렸다. 행복한 하루였다.
이어진 기자 (언남초등학교 /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