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화 독자 (서울개일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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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이 시는 만해 한용운 선생이 남긴 수많은 시 중 하나인 ‘님의 침묵’이다. 언뜻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긴 시로 보일지 몰라도, 이는 만해 선생이 사랑하는 조국, 조선을 위해 쓴 시였다. 9월 5일, 나는 일제 강점기 속에서도 꿋꿋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 홍성을 방문했다.
생가를 들어서자 마자 나를 맞아준 것은 날카로움 속에서도 인자함이 느껴지는 만해 선생의 흉상이었다. 여느 시골의 초가집처럼 그의 생가는 작고 고즈넉했다. 한 나라를 이끌었던 위대한 인물의 집으로 보기엔 초라했지만, 그의 깨끗한 성품이 자라난 곳으로 느껴지기엔 충분했다. 잠시 동안 만해 선생의 기를 받고 나서, 나는 언덕 위의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에는 위풍당당 만해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아빠와 내 동생은 다가가 큰 절을 했다. 정말, 그러한 절을 몇 번이나 받아도 될 분이셨다. 뜻깊은 탐방을 한 후, 나는 옆에 있던 만해 선생의 기념관에 들러 만해 선생에 대해 더 알아보았다.
신동이란 소리를 듣다.
승려이자 사상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청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책을 꼼꼼하게 외워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세계를 알다.
전부터 세계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만해 선생은 러시아, 중국, 일본 등지에 다녀오며 한국에는 없던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그는 열린 자세로 독립운동을 펼친 분들 중 한 명이 되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여 독립의 굳은 의지를 다졌다.
불심으로 바로잡다.
만해 선생은 결혼 후 1905년 득도하여 불심에 빠져들었다. 한창 일본의 행패가 심할 무렵, 그가 고국 독립을 위한 민심 독립을 위해 애쓰던 참이었다. 그에게 불심은 ‘부처님을 따르라’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온 국민의 마음을 통일 시킬 하나의 획기적인 수단이었다. 그 이후 불교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한 만해 선생의 노력이 계속되었다.
대한으로 넘어온 일본은 누구요.
1918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오던 만해 선생은 1919년 3.1 운동을 지도했고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했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33인 중 불교대표로 나선 만해 선생은 많은 운동가들이 그랬듯, 일본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은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 죄를 알고 잘못을 빌면 풀어주던 때였다. 그래서 아무리 굳은 의지를 가진 운동가들도 혹독한 고문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잘못을 빌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만해 선생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법정 앞에서도 그는 허리를 꼿꼿히 세우고 확고한 의지를 앞세워 할 말은 모조리 했다.
‘내가 죄인이오? 내가 보기엔 그럴 이유가 없소. 평화롭던 대한 땅에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놈들은 당신네들인데, 왜 내 땅을 지키려는 내가 잘못했소? 할 말 있으면 말해 보시오.’
대쪽같은 지조는 계속되고.
그에게 있어 지조는 그의 우상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변절하여 일본편이 되어 활동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만해 선생은 그들을 못마땅해 하며 마음 속으로는 절교를 한 상태였는데, 한 변절자를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만해 선생님, 반갑습니다."
"누구시오?"
"저 입니다. OO이오."
"OO이 누구요?"
"OOO. 잊으셨습니까?"
만해 선생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아는 OOO은 벌써 죽어서 장송했소."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만해 선생에게 몇몇 분들이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이 만해의 거처를 마련해 주려 하자 스님들이 54평의 땅을 아낌없이 내 주었다. 그 집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았다. 이것을 본 만해 선생은 ‘남향은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라며 불쾌한 마음에 당장 북향집으로 개조해 버렸다. 그곳은 그 유명한 ‘심우장’으로, 조국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가 되어 주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
불심으로 국민의 단결심을 모으려 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 대쪽같은 지조로 일본의 행패를 막으려 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 세계를 보는 눈으로 조선을 개척하려 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 어렸을 때 신동이라 불리었던 능력을 오직 나라를 위해 바친 만해 한용운 선생. 그는 단연 조선땅에 핀 한 그루의 무궁화였다.
진시화 독자 (서울개일초등학교 / 6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