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미 독자 (서울서이초등학교 / 5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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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자라는 이름을 달고 탐방취재를 가던 날, 나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안고 한껏 부푼 마음이었다. 어떤 기자 친구들과 만날까? 어떤 내용을 기사로 담을 수 있을까?
첫 번째 탐방지가 ‘조선왕릉’이라 더 기대가 되었다. 작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조선왕릉’을 지정한 것을 기념해 선릉에 가본 적이 있다. 부모님과 함께 조선왕릉의 비밀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유산임을 이미 확인한 바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왜 우리의 ‘조선왕릉’을 가치있게 판단하고 세계인이 함께 보존해야 할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을까? 바로 그 이유를 찾아 전달하게 위해 푸른누리 기자 80명이 나선 것이다. 드디어 4월 16일 아침, 푸른누리 2기 어린이 기자단 80명이 종묘, 태릉, 동구릉으로 탐방취재를 떠났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자! 우리 조상의 얼이 숨 쉬는 곳으로~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난 20명의 기자들과 함께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는, 종묘! 종묘에 도착하니, 다른 60명의 친구들과 붉은 홍살문이 먼저 우리를 반겨주었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 제사를 지내는 국가 최고의 유교사당이다.
겉모습부터 웅장한 규모가 한눈에 들어왔다. 동양의 파르테논신전이라 불릴 만큼 우리나라의 종묘가 많은 건축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니 조상들의 정신과 함께 뛰어난 건축기술까지 한번에 느낄 수 있는 장소인 것 같아 뿌듯했다.
종묘의 주전인 정전은 국보 제227호다. 건평이 1,270㎡로 같은 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바로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국가 최대 규모의 제사를 지냈고, 영녕전에서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다고 한다. 신을 맞는 절차, 신을 즐겁게 하는 절차, 신을 보내는 절차로 구분해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니 우리 조상들은 죽은 영혼을 모시는 것도 예의가 바른 것 같아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며, 제사드릴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포함하는 종묘제례악에 맞춰 진행된다고 하니 직접 그 현장을 담아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떻게 500년이 넘는 어마어마한 세월동안 종묘라는 같은 공간에서 종묘제례라는 의식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을까? 종묘라는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식과 제사 지내는 그릇,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로 전해진다고 하니, 그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후손들에게 자랑할 만한 우리의 유산인 것 같다.
조선의 왕이 묻힌 곳에 비밀의 문이 있다
종묘 취재를 마친 후, 푸른누리 기자단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중 ‘태릉’(문정왕후의 무덤)과 ‘동구릉’(태조 이성계의 무덤 등)을 취재하기 위해 힘차게 달렸다. 유교를 국가의 종교로 믿었던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간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영혼을 사당에 모셨고, 백(몸)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무덤을 만들어 숭배했다. 조선왕릉은 바로 왕조의 귀한 몸을 땅에 모시고 숭배한 고귀한 장소였다. 죽은 왕의 무덤을 웅장하게 만들고 신성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은 살아있는 왕의 권위까지 강화시키는 수단이 되었다고 한다.
지난 2009년 6월 27일, 유네스코는 조선왕릉 전체 42기 가운데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두 무덤만 제외하고 40기 모두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조선왕릉은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홍살문을 따라 정자각이 있고, 신도를 따라가면 왕의 무덤인 봉분이 드러난다. 특히 무덤 바로 앞에 놓인 혼유석은 혼령이 노니는 곳이라는 돌상인데 그 실제 정체를 알면 놀랐 것이다. 겉으로는 제사를 지내는 상처럼 보이지만 혼유석 밑에는 석실로 연결되는 비밀통로가 숨어있다고 한다. 왕족의 무덤에는 귀한 부장품도 함께 넣었는데 석실의 이음매를 대형 철제고리로 고정하고, 입구에 이중 돌빗장을 채운 후, 석실 사방을 석회, 모래 자갈반죽을 두껍게 채워 도굴을 막았다고 한다.
정자각의 옆면에 계단을 둔 이유도 놀랍다. 참배자가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오도록 설계한 것이라는데 동쪽은 시작과 탄생을 의미하고, 서쪽은 끝과 죽음을 의미한다. 조선왕릉은 우상좌하의 원칙으로 이루어졌는데 함께 있는 봉분중 오른쪽의 무덤이 왕의 무덤이라고 보면 된다. 봉분 뒤에는 소나무가 참 많은데 그 이유는 바로 소나무가 나무중의 나무로 제왕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이용한 지혜도 놀랍다. 봉분 주변에 심은 떡갈나무는 산불을 막아주고, 홍살문 주변에는 습지에 강한 오리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왕릉은 왜 서울,경기지방에 몰려있을까? 그 이유는 한양 궁궐에서 10리(4km)~ 100리(40km) 이내에 만들어야 왕이 제례를 올리기 위해 하루만에 행차를 다녀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동구릉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왕릉으로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묻힌 곳이다. 그곳에서 처음 배운 단어는 동원이강릉과 쌍릉인데 먼저 동원이강릉은, 두 언덕에 1개씩 봉분이 있는 것이고, 쌍릉은 한 언덕에 2개의 봉분이 있는 것이다.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동구릉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꼈고, 푸른누리 독자들에게도 꼭 추천하고 싶은 장소다. 아쉬웠던 점은 조선왕조의 의궤였는데 그 책 속에 국장 때에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하게 나타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의의궤는 지금 아쉽게도 프랑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의궤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프랑스에 빼앗긴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고, 꼭 다시 의궤를 되찾아서 멋진 조선왕조의의궤를 우리나라의 멋진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다.
숨가쁘게 달려온 푸른누리 어린이자로서 첫 번째 취재는 이렇게 끝났다. 첫 경험이었지만 너무나도 재밌었고,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조상을 진심으로 섬기고 예의를 갖춰온 우리 선조들의 따뜻하고 곧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600여년 이상 그 전통을 잘 가꾸고, 세계로부터 보존할 가치를 인정받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조선왕릉’을 여러분들도 직접 찾아가보길 바란다.
박소미 독자 (서울서이초등학교 / 5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