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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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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률리 나누리기자 (일동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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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주의로 인도 사회를 이끈 간디

"우리는 모두 비폭력 주의로 사회를 다스려야 합니다 " 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굴까요? 하고 물어 보면 고민 끝에 간디! 라고 외친다. 그리고 최근에 어떤 신문회사에서 한국, 일본, 중국의 기자 100명을 대상으로 ‘ 현대 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 라고 물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중에는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7위에 오르고 1등은 역시나 인도의 ‘ 간디 ’ 라고 한다. 2등은 중국의 ‘ 마오쩌둥 ’ 이고 3등은 베트남의 ‘ 호치민 ’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그 이유는 현대 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모른다는 건 그만큼 책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또 워싱턴, 링컨은 알면서 아시아의 인물을 모른다는 것은 서양 중심의 생각에 빠져 있다는 증거다. 그럼 지금부터 현대 아시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의 1위를 차지한 ‘ 간디 ’ 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구자라트 주 ‘ 포르반다르 ’ 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간디의 아버지는 무려 세번이나 결혼을 했는데 그 중 세번째 부인이 간디를 낳았다고 한다. 간디의 어머니는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낳았는데 그 중 간디는 네번째로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 모니야 ’ 라는 애칭으로 불린 어린 시절의 간디는 가족의 응석받이이자 귀염둥이로 자랐다. 하지만 간디는 어렸을 적부터 겁이 많던 아이였다. 그런데 간디는 열세 살이 되던 해 카스투르바이라는 소녀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1887년 열 여덟 살에 대학 입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충고로 영국으로 유학을 가 변호사의 꿈을 꿨다. 하지만 간디는 변호사가 되고 난뒤 처음 맡은 소송에서 너무 떨려서 아무 말도 못한 채 주저 앉아 버렸다. 그러던 중, 형이 아는 사람이 간디에게 남아프리카의 소송 사건을 의뢰를 했다. 그래서 간디는 그 곳에서 무려 22년 동안 살았다. 그리고 그 소송 사건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간디는 주변에서 많은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간디가 22년 뒤에 인도로 귀국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영국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게 되자 간디는 전 인도 사람들이 상점의 문을 닫고, 학교에도 가지 않고, 공장도 가동을 멈추는 ‘ 전 인도의 총파업 ’ 을 일으켰다.

하지만 비폭력 주의를 중요시 여기는 간디의 주장에도 인도 사람들은 영국에 대해 너무 화가 나서 1929년 12월 31일 자정이 되자 국민회의는 인도의 독립을 선포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운동을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간디는 항상 어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총독에게 알렸다. 그 이유는 간디는 상대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승리를 얻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3월 12일 간디는 79명의 청년과 함께 행진을 시작했다. 그리고 간디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매일 1시간씩 물레를 돌리며 걸었다. 그러다가 그가 거쳐간 마을마다 수백 명씩 행진에 참여했다. 하지만 영국 경찰은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강철 곤봉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외국기자에 의해 이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래서 1년 뒤 간디는 총독인 어윈 경과 협상을 맺어 운동을 끝내고 런던에서 열리는 원탁 회의에 국민 회의의 대표로 참가해 인도의 독립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다. 하지만 영국의 수상 처칠은 "반 벌거숭이 중놈이 영국 황제의 대리인과 협상을 한다." 고 하며 화를 냈지만 간디는 원탁회의를 위해 런던으로 갔다. 영국의 언론들은 간디를 따라다니며 칭송했고, 간디가 불태웠던 면직물 공장의 노동자들까지 간디에게 환호했지만, 간디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이 인도로 돌아와야만 했다. 간디가 돌아와보니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오히려 자치권은 줄어들었고, 집회와 거부운동은 금지 되었고, 많은 단체들이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총독이 강력한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서 간디는 단식을 하고 싶었지만, 62살의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단식 며칠 만에 죽을 고비를 맞았다. 그래서 간디는 오렌지 주스 한컵을 마시고, 단식을 끝냈다. 몇년 뒤 간디는 1934년에 국민회의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간디는 1942년 다시 국민회의를 이끌며, 최후의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영국에 대항하여 비폭력 운동을 벌일 것을 호소했다.

그런데 간디와 많은 지도자들은 체포되었고, 62년을 함께 산 아내가 죽었지만, 처칠은 늙은 간디가 영광스럽게도 감옥에서 죽는 걸 보게 될까봐 간디를 석방했다. 그리고 그해 치러진 총선거에서 처칠은 낙선했고, 클레멘트 애틀리라는 새로운 수상이 뽑혔다. 그래서 클레멘트 애틀리는 인도의 총독에게 인도 독립의 과제를 맡겼다. 그러나 인도 독립은 새로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다. 바로 종교 대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교도와 힌두교가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간디는 이런 상황을 보고, 우린 같은 인도인 입니다. 제발 서로의 증오를 버립시다! 하며 호소하기도 했다. 그리고 간디는 최후의 단식을 결심했고, 여러 집단의 대포들이 간디에게 단식의 중단을 호소하며 찾아왔다. 그래서 살인자들 조차도 울면서 무기를 내려 놨다.

하지만 1948년 1월 30일 78살 간디는 평소처럼 오전 3시 30분에 일어나 아침기도를 하고 오후 5시 10분 간디는 공개 기도회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순간 땅딸막한 젊은 남자가 군중을 밀치며 나와 간디를 향해 총을 세발 쐈다. 그래서 간디는 신의 이름을 나직이 흘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암살범은 지난번 폭탄 사건의 범인과 같은 단체에 소속된 나투람 고드레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교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간디의 몸은 장미꽃으로 덮였고, 또 200명의 군인이 끄는 받침대 위에 관이 놓이고, 그 위로는 국기가 덮어졌으며, 화장터에 200만명의 인도인들과 세계 여러 곳에서 유명한 사람들과, 높은 사람들이 간디에게 국가 원수로서의 경의를 표했다.


나는 이 책을 위해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살아 온 간디 선생님이 너무나도 존경스럽다. 그리고 비폭력 주의를 어기지 말라며 또 운동을 일으키기 전에 항상 적에게 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말도 하시는 것을 보면 남을 위한 배려가 매우 크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분이 암살을 당했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간디 선생님의 비폭력 주의와 남을 위한 끝없는 배려를 본받으며 내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깊게 해본다.

왜, 지금까지도 간디라는 인물에 대해서 회자되고 있는 가는 간디에 관한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역사에 길이 남긴 인물들에 대해서는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감동적인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마친다.

김률리 나누리기자 (일동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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