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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호 10월07일

문화 속으로 추천 리스트 프린트

남의재 독자 (당평초등학교 / 6학년)

추천 : 8 / 조회수 :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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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가니 역사가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길따라’라는 역사를 공부하고 현장답사를 하는 모임을 통해 답사를 다니고 있다. 지금까지 길따라와 함께 전국의 많은 유적지를 다니며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답사를 하면서 우리 역사의 소중함과 바르게 알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끼게 되었다.친구들과 함께 가니 더없이 좋기도 했다.

이번 9월 5일에는 동학을 보러 전라도로 갔다. 매우 이른 시간, 새벽 4시에 꿈에서 깨어나 남천동에 집결하였다. 이른 새벽이라 모두의 얼굴에는 떨치지 못한 잠이 남아 있었다. 버스에 탑승하여 전주로 출발했다. 동학을 보기 위해서는 전주로 가야 하는데 부산에서 아주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버스안에서 피곤한 몸을 달랠 수 있었다. 약 5시간을 달려 드디어 전주에 도착했다.


첫 답사지는 전주성이었다. 전주성은 동학농민군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 점령을 했던 곳이자 전주협약을 맺었던 매우 의미있는 곳이다. 지금은 흔적을 거의 찾아 볼수 없고 풍남문만이 남이 있다.

전주성 안에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다른 왕들의 어진이 모셔진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은 동학과 관련이 없지만 전주로 온다면 꼭 가보아야할 곳이다. 이곳에 있는 어진중 4개가 진짜 어진이며 다른 것은 모두 후손들의 얼굴과 합성하여 만든 어진이라고 한다. 어진들중 철종은 군복차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철종이 그만큼 힘이 없는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경기전에는 특별한 가마가 있다. 그가마는 어진이 외출 할 경우가 있는데 오직 그때만 사용하는 것이란다.살아있을 때와 돌아가셨을 때의 왕에 대한 대우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태조 이성계의 눈매와 표정이 아주 힘이 있어 보였다. 조선을 세우고 이끌만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경기전을 보고 나서 뒤편에 있는 전주사고로 갔다. 전주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주신 분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후로 사고는 산으로 옮겨지고 지키고 보존하는데 더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경기전 앞 태조로를 따라 가니 전동성당이 있었다. 전동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무척 아름답다. 한때 이곳에서는 아주 안좋은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두분의 천주교신자가 부모님의 위패를 테운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아름다운 전동성당을 둘러 보면서 마치 유럽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으로 본격적인 동학을 보러 갔다. 동학은 조선후기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서학을 반대하는 종교였다. 현재는 천도교로 교리를 전하고 있다. 이 동학은 인내천 사상을 중심으로 빠른시간에 농민들 틈으로 퍼쳐 나갔다. 조선 조정에서는 신분 차별을 반대하는 동학이 더 커질까봐 두려워 최제우를 사형에 처하게 했다. 그러나 제 2대교주 최시형이 오르자 용담유사와 동경대전이라는 책을 만들며 신자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조선 조정의 문란한 정책으로 인해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동학을 더 따르게 되었다. 그후 최시형은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교주 신원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동학은 종교적인 학문에서 정치적인 부분에도 관여하였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농민들이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전주에서 한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정읍으로 갔다. 정읍의 너른 들판을 보면서 곡창지대임을 알 수가 있었다. 이렇게 넓은 들판에서 농사를 지어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하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관리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도착하여 가장 먼저 동학농민운동의 계기가 된 이유중 하나인 만석보에 갔다. 만석보는 고부군수 조병갑이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서 세운 보이다. 원래 보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만들게 하여 세금을 1마지기당 1~2가마니씩이나 세금을 더 거두어 백성들을 괴롭혔다. 욕심을 부려 곡식을 쌓아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먹고 살게만 해 달라하는데도 그것도 해결해주지 못한 조선왕의 무능함에 왠지 울분이 터졌다.

화가 난 백성들이 더이상 참지 못해 낫을 들고 괭이를 들고 일어섰다. 그렇게 농민들이 모인 곳이 말목장터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가서 말목장터로 이동했다. 지금은 주변에 건물들이 자리잡아 별로 크지 않고 매우 작았지만 옛날에는 수백명의 농민들이 모일 정도로 컸다고 한다. 내가 3년전에 왔을 때만 해도 매우 작은 감나무였는데 지금은 아주 컸다. 원래는 말목장터의 감나무가 있었는데 몇년전에 낙뢰를 맞고 그만 죽어 버렸다. 그래서 감나무를 다시 심은 것이다.낙뢰를 맞은 감나무는 기념관에 전시가 되어 있었다.이 감나무도 동학농민운동을 우리에게 오래도록 기억하게 해줄 매신저와 같았다.

점심을 먹고 나자 우리는 황토현 전적지로 가게 되었다. 황토현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이 관군에 맞서 첫승을 거둔 전투지였다. 전봉준은 키가 작아서 녹두 장군이라 불렸지만 지혜가 뛰어나고 지도력이 강한 장군이었다. 조총을 막기위해 닭장에 짚을 넣어 총을 막았다고 했다. 그리고 주변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복을 하여 관군을 기습하는 지략을 발휘한 것이다. 녹두 장군에 대한 노래도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이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에는 전봉준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마지막 탐사지는 바로 백산 이었다. 백산은 매우 낮은 산이라 언덕이라고 해도 괜찮을 정도다. 백산에서는 정읍천도 보였고 주위의 배들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백산에 모인 동학농민군들은 관군과 맞서기 위해 백산에 올라 힘을 모으고 결의를 다졌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동학농민군들이 정말 자랑스럽게 여겨졌다. 비록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새로운 시대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동학을 찾아서 먼길을 다녀온 보람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용기와 지혜로움에 또 한번 감동을 받은 답사였다.

길을 따라 가니 그곳에 역사가 있었다. 우리는 늘 우리 역사를 접하고 있다. 역사가 없다면 우리가 지금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다. 엄마와 함께 한 이번 동학을 찾아간 답사는 농민들의 마음을 생각하게 하는 답사이기도 하였다.

남의재 독자 (당평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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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영
성당중학교 / 1학년
2010-10-10 10:17:51
| 힘들었겠지만 좋은 체험하셨네요 기사 잘 보았습니다
변정재
부산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 / 6학년
2010-10-18 18:26:36
| 뜻깊은 답사를 하고 왔네요.
기사 잘 읽었습니다.
최희
청심국제중학교 / 1학년
2010-10-20 20:44:12
| 동학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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