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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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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나누리기자 (동학초등학교 / 6학년)

추천 : 44 / 조회수 : 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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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을사늑약의 생생한 비극의 역사 현장 중명전

3․1절을 앞두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역사 현장인 중명전에 지난 2월 22일 다녀왔다. 중명전을 관람하기 위해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중명전 관람 예약’을 하고 시간에 맞추어 갔다. 안내해설사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반갑게 맞아주시며 관람 안내를 해주셨다.


덕수궁 중명전은 1897년경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다. 중명전(重眀殿)의 뜻을 살펴보면 ‘重’은 ‘무거울 중’이지만 ‘중복된다’, ‘거듭된다’의 뜻도 있다. 그리고 ‘眀’은 ‘밝을 명’, ‘광명’으로 중명전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 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러시아인의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전각 중명전은 근대문물수용에 앞장섰던 고종황제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하는데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이었지만, 1904년 경운궁(현재 덕수궁) 화재로 고종황제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04년부터 고종황제는 1907년 아들 순종황제에게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주로 중명전에서 국사를 처리하였다. 중명전은 덕수궁에 속한 전각이었지만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대한제국 당시의 전각들이 대부분 훼손되어 현재는 덕수궁과 떨어져 있다. 1904년 고종황제가 머물면서 국정을 논하던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1907년 고종황제가 헤이그특사를 파견한 곳이다.


1905년 11월18일 새벽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되었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을사늑약이 강제되는 자리에서 찬성한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농공부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을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이 자리에 있던 참정대신 한규설이 반대하자 이토가 마루방에 가두어 버렸다.

을사늑약의 복제본도 있어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을사늑약은 전문과 5조로 되어 있다.

< 전문 >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아래에 열거한 조목들을 약속해 정한다.
< 1조 >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금후에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독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및 그 이익을 보호한다.
< 2조 >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책임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격의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 3조 >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며 직접 한국 황제를 만나볼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회 아래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행사하며 아울러 본 협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할 것이다.
< 4조 >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의 조항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 5조 >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이에 대해 을사늑약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다섯 가지 제시되어 있었다.

 
첫째,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황궁을 침범하고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였다.
둘째, 대한제국의 주권자인 광무황제는 결코 늑약을 허락하지 않았다.
셋째, 필수적인 위임, 조인, 비준이라는 조약 체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넷째, 국제법적인 조약문의 형식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다섯째, 한민족 전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이 이렇게 성립할 수 없었음에도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국권이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약소국의 아픔과 비극을 느끼면서 대한제국의 투쟁을 살펴보았다.


을사늑약 이후 주권 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은 민족적 투쟁을 하였다. 고종황제는 주권 회복을 위해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에게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는 친서를 보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렸다.

전국 유생들은 항일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자결로 항거했으며, 종로거리의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자진 휴교하였다. 또한 전국에 의병이 조직되어 민종식, 최익현 등 각지의 많은 유생들이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며 항일 여론을 고조시켰다.


고종황제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안타깝게 이 특사들은 회의장 안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만국평화회의보와 각국 대표들단이 모인 국제협회에 한국 정부의 입장 등을 알렸다.


중명전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가니 고종황제 어진, 어새, 관련 문건 등이 전시되어 고종황제가 집무공간으로 사용하시던 모습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강제되고 고종황제의 주권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역사적 장소이다.

관람을 마치고 중명전을 바라보니 대한제국의 황제가 머물기에는 너무 작은 건물이어서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중명전에서 ‘을사늑약’ 강제를 살펴보니 일제의 만행이 실감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로 다가온 3·1절의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이예은 나누리기자 (동학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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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우
청심국제중학교 / 1학년
2011-03-03 17:06:35
| 역사를 알아아 다시 그런 아픔을 되풀이 하지 않겠죠~ 자세한 내용 감사합니다. 빠른 시일내에 덕수궁에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국채림
서울중평초등학교 / 5학년
2011-03-08 20:32:04
| 기사 잘 읽었어요....추천하고 갑니다!
손해수
숭신여자중학교 / 1학년
2011-03-10 17:07:40
| 역사는 알면 알수록 새롭고 때론 가슴 아픈 일이 많다는걸 느꼇습니다.물론 흥미롭고 역사가 있어야 미래도 있다는것도 알고요..이예은 기자님 소중한 기사 잘 보고 갑니다
위청비
순천북초등학교 / 6학년
2011-03-11 15:49:14
| 덕수궁 중명전에 이런 역사가 있었군요. 우리나라 국민들이 절대 잊지말아야할 장소이자 역사적 교훈인것 같아요. 일본이 진실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장이화
용지초등학교 / 5학년
2011-03-11 21:04:44
| 다시는 이런 불행한 일이 없으면 좋겠어요^^
전현환
대륜중학교 / 1학년
2011-03-12 11:40:04
| 저도 역사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되겠지요.
김희건
선유중학교 / 1학년
2011-03-16 20:09:17
| 중명전에 대해서는 책을 통해서 만나보았었는데... 저도 다시한번 방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사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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