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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호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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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혜 독자 (대구상인초등학교 / 6학년)

추천 : 150 / 조회수 : 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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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왕따

1. “너도 우리들처럼 행동했으면 좋겠거든”


“야! 넌 그렇게 쉬운것도 제대로 못해?” 갑자기 들려온 여자 아이들의 앙칼진 목소리가 조용한 자습시간을 흔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교실 바닥에는 색종이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작고 왜소한 체구의 아이가 허둥지둥 떨어진 색종이를 줍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지 이제는 안 봐도 뻔하지. 또 민희다.


“넌 정말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니? 지금도 봐, 너 때문에 우리가 다 피해를 입는단 말이야!” “저, 정말 미안해.” 민희는 자신을 둘러싼 아이들 가운데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니, 수학시간에 쓸 전개도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역시 민희 분단 아이들의 전개도를 만들 색종이가 모두 민희 책상으로 모여 있었지만, 여자아이들이 민희에게 시비를 걸거나 구박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아이들도 이런 일을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 몇몇의 아이들은 매일 민희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고 있기도 했다.


“야, 야! 선생님 오고 계셔!” “칫!”

민희를 꾸중하던 아이들 중 가장 키가 큰 여자아이가 짜증난다는 듯이 짧게 말을 내뱉더니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남이 보기에는 마치 교과서를 가지러 잠시 이동한 것처럼 무척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그 아이의 눈빛은 분하다는 마음과 함께 허튼 말 꺼내지 말라는, 민희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서민지, 예쁜 외모에 큰 키, 거기다가 착하고 나긋나긋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또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반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무서운 이중인격자이기도 하다.

민지의 또 다른 성격은 전에는 민지의 단짝 아이들만 알고 있었지만 민희가 우리 반 왕따로 굳혀진 이후로는 반 아이들, 아니 거의 6학년 아이들 전체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민지는 자신의 나쁜 성격이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 모두 민희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이 민지를 따르고, 그럴수록 민지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는 모두 왕따로 만들거나 주기적으로 괴롭히는 등 자신의 권력을 휘둘렀다. 내 생각엔 아이들이 민지를 따른다기 보다 자신도 따돌림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민지의 시중을 들어 주는 것 같아 별로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한 번씩 ‘나도 어쩌면 왕따가 되는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민지의 말에 자주 맞장구를 쳐 주거나 “맞아, 네 말이 옳아” 등 좋은 말만 해 주고 있다.

민희도 지난 5월 말 까지는 나와 같은 평범한 아이였는데, 6월 첫 주 학교에 와 보니 민희는 민지 패거리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민지가 ‘쟤는 왜 남의 일에 끼어드는 거야? 재수없어’ 라고 생각할 것 같아 8월이 된 지금까지도 민희가 왕따가 된 이유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아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일까?


“띵 - 동 - 뎅 - 동-”

2교시 쉬는 시간의 종이 울리고, 썰물이 밀려가 듯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도 다음 시간인 체육을 위해 몸을 풀어두려고 교실을 나가려는 데, 문 옆 사물함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던 민지가 걸상에서 일어나는 나를 보더니 손짓으로 불렀다. 처음에 나는 희영이를 부르는 줄 알았는데, 아이들이 모두 운동장에 나가고 나서도 여전히 부동자세로 있는 민지를 보자 갑자기 덜컥,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왜 부르는 걸까? 민지가 이렇게 따로 나를 불러내는 일이라면 모르긴 몰라도 좋지 않은 일이 틀림없어. 아아, 내가 무슨 잘못을 한거지?’ 민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괜히 먼저 겁먹은 티를 내면 민지가 날 이상하게 볼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강하게 먹고, 먼저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래, 할 수 있어, 자신 있게. 당당하게!’


“민지야, 부, 불렀어?” 민지 앞이라 긴장이 되었는 지 그렇게 속으로 연습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만 말을 더듬어 버렸다. 어쩌지 하는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민지는 그런 내 행동은 대수롭지 않은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와 천천히 팔짱을 꼈다. 평소 반에서 거들떠도 보지 않던 나를, 지금은 이렇게 다가와 친한 척 하는 것을 보니 분명 자신이 해결하기 곤란한 일을 부탁하는 모양이였다. 민지가 무엇 때문에 내게 이러는지 대충 결론이 나자 내 팔에 닿는 민지의 살갗이 갑자기 기분 나쁘게 느껴졌지만, 감히 민지 앞에서 ‘팔짱 좀 빼 줄래?’ 라든가 ‘나 기분 나쁘거든?’ 이란 말은 할 수 없는 노릇이라 나는 가만히 있었다.


민지는 천천히 내게 말했다. “있잖아, 지연아- 넌 내 친구 맞지?”간드러지는 콧소리. 평소에는 항상 나를 무시했으면서 지금은 왜 내게 ‘친구’라고 하는걸까. “으...응” “그렇지? 너도 우리 반 왕따가 민희라는 거 잘 알잖아. 근데, 다른 아이들이 너랑 민희랑 친하게 지낸다고 하더라? 나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러니까 너도 이제 우리들처럼 행동했으면 좋겠거든. 무슨 뜻인지 알지?”


민지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띄우면서 내게 말했다. 부드럽게 돌려 말했을 뿐이지 민지의 말은 ‘민희랑 친하게 지내지 마!’ 라는 뜻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민지의 기에 눌려서인지 ‘아니, 난 못하겠어.’ 라는 내 진심은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응.. 알았어” “그래. 잘해야 해”

민지는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나직이 대답하고는 휙 몸을 돌려 교실을 나갔다. 민지의 긴 머리칼이 휘날려 내 시야를 잠시 가리다 사라졌다.


“......”

벽시계는 쉬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알리지만, 차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민희에게 미안한 마음, 덜컥 민지의 말을 받아들여 버린 한심한 내 모습에 대해서 생각이 남을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두 복잡한 생각이 얽혀 버려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아아, 머리가.. 깨질 것 같아’


2. 내친구, 민희


“자, 오늘은 순발력 테스트를 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테스트가 끝난 후에는 팀을 나누어 깃발뽑기 게임을 연습하세요. 수행평가에 포함하겠습니다.”

분홍색 모자를 쓰고 한 손에는 깃발을 쥐신 여선생님께서 순발력에 대해 설명하시는 동안, 선생님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민지 패거리가 모여 민희를 골려주기 위해 작전을 짜고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대할 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민희는 내 곁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하며 태연히 앉아 있었다. 민희의 그 큰 눈에서 곧 눈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아 나는 민희가 무척 안쓰러웠다, 하지만 민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민희를 외면하였다.


‘그러고 보니, 5학년 때는 민희와 정말 친했었는데...“ 나랑 같은 5학년 3반 이었던 서민희. 친구들의 분위기 메이커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입담과 괜찮은 성격으로 한때는 회장까지 했었다. 나는 언제나 민희를 부러워했고, 민희의 친구가 되어 정말 하루하루가 행복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다시 그때처럼 평화로워 질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누가 나를 팔꿈치로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민희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연아, 이제 테스트 시작한대. 나중에 순발력에 대해 물어본다는데 너 설명 들었어?” “......” “지연아? 황 지연? 너 어디 아파?” 옆에서 민희가 나를 계속 불렀지만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 민희의 이상하다는 눈빛이 느껴져 내 마음은 바늘로 찌르는 듯 자꾸만 아파왔다. ‘민희야, 미안해. 내 진심은 그런게 아니라....’


툭. “아주 잘하고 있어. 황 지연” 누군가 내 어깨를 치더니 빠르게 속삭이고는 돌아갔다. 나는 잠시 놀랐지만, 그 아이가 돌아간 곳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짐작이 가니까.


“흠, 이제부터 순발력 테스트를 진행하겠습니다. 아까 설명한 대로만 하면 문제없어요.” “예-” 아이들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였다. ‘이런, 나는 설명을 하나도 듣지 못했는데’

테스트는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짧게 한숨을 쉬는데, 민희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지연아, 너 못 들었지? 내가 알려줄게, 우린 친구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나올 뻔 했다. 민희야, 내게 다정하게 다가오지 말아줘, 나를 믿지 말아줘, 네가 그러면 나는 두 아이 사이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모르겠단 말이야..!


3.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 한 것 같아”


“에,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치겠다. 오늘은 색종이 전개도를 만들어 바닥이 많이 더러우니 자기 자리는 직접 청소하고, 회장은 각자 1인 1역과 자리가 깨끗한 지 검사해서 칠판에 적어라. 이상!” "안녕히 계십시오!” ‘후우, 겨우 끝났다. 정말 오늘따라 더 힘든 수업이었어.’ 무거운 마음으로 실내화를 갈아 신는데, 웬 그림자가 내 앞을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민지와 하정이가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이야?” 나는 괜히 겁이 나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민지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하정이 역시 민지의 단짝 친구로써 내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어머, 얘 겁먹었나 봐. 우리가 무슨 짓을 한다고... 호호호” 하정이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웃었다.


“지연아. 오늘 시간있어?” 민지가 내게 말했다. “으응. 있긴 한데, 왜?” “응, 다름이 아니고, 오늘 우리랑 같이 놀러 갈 수 있나 해서” “뭐, 정말?” 민희 사건으로 또 무슨 한소리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생각해보니 너랑 우리랑 한 번도 제대로 같이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하, 하정아...” 눈물이 핑 돌았다. 하정이가 그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줄 줄 이야.


“그럼 내가 조금 있다 전화할게. 네 번호 좀 가르쳐줄래?” “그, 그래!”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하정이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였던 아이들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좋은 친구들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내 스스로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리 줘 봐. 저장 했어?” “응, 여기” 하정이는 내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가 확인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보자” “응, 잠시 후에 봐” 나는 하정이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하정이와 헤어지기 전 하정이가 지었던 웃는 얼굴에서 껄끄럽다는 표정을 느낀 은 내 착각이었을까? “에이, 모르겠다. 민지가 부를 때까지 벤치에 앉아 있지 뭐.” 나는 밖으로 나와 운동장 위쪽 구석진 벤치에 앉았다. 민지 패거리 아이들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콩닥거렸다. 다른 아이들이었다면 무심했겠지만 민지가 날 불러 주었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쁘기만 했다.

‘잘하면, 나 민지패거리의 제 6의 맴버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큭큭’ 어쩌면 민지 패거리 아이들인 민지, 하정이, 누리, 정윤이, 희영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전화가 안 오는거지? 무슨 일 있나...”


내 중얼거림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앗, 전화다! 흠흠...” ‘딸칵!’ “여보세요. 지연이니?” “어, 어! 나야. 하정아” “오래 걸려서 미안해, 나랑 민지는 하늘 공터 미끄럼틀 쪽에 가 있을게. 바로 올 수 있지?” “응! 지금 바로 갈게.” “어.” 하정이의 마지막 말투가 퉁명스러웠지만 별로 대수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하늘 공터라고? 바로 학교 앞인데, 무슨 일을 하고 왔길래 시간이 이렇게 많이 걸린거야?’ 나는 손목에 찬 형광색 시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정이가 내 번호를 알아간 지 벌써 30분은 지난 것 같았다. 왠지 초조한 마음이 들어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공터가 그토록 멀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앗! 저기있다’ 저 멀리로 파란 미끄럼틀 위에 걸터앉은 민지가 보였다. 민지 역시 나를 발견하고는 하정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는데, 하정이의 표정에서 알 듯 모를 듯한 의미심장한 미소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왜 미소 짓는거지? 재미있는 놀이라도 생각해 놓은 건가?’


“야! 황지연! 이쪽이야. 빨리 와” 민지가 아리송해 하는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나는 헐레벌떡 민지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헥헥, 미안해... 내가 좀 늦었니?”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냐. 괜찮으니까 빨리 놀자” 하정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뭘 하고 놀꺼니?” “지옥탈출 하자! 그게 제일 스릴 있고 재미있어” “지, 지옥탈출?” “어머, 너 한 번도 안 해봤어?” 민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응.. 평소에는 놀 시간 없이 좀 바빠서...” “그래, 알았어. 그냥 술래를 피해서 도망 다니면 되는 거야. 자세한 설명은 필요없을 것 같으니까 그냥 빨리하자” 하정이는 무엇이 그렇게 바쁜 지 자꾸만 빨리 시작하려 하였다. “아, 저. 저기..” 내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한 하정이의 태도에 나는 잠시 황당해졌다. 하지만 곧 ‘아, 잘나가는 아이들은 다 저렇게 행동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인기 많으려면 너무 착하기만 한 성격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아. 시작!” “꺄 ㅡ 악! 이리로 오지 마! 저리 가” 시작 신호와 동시에 민지의 비명이 공터를 울렸다.술래가 된 하정이가 빠른 속도로 민지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 도통 내게는 접근하지 않는 통에 나는 하정이 뒤 쪽에서 어색하게 서 있다가, “하정아 ㅡ 여기 나도 있다!” 라고 용기를 내어 외쳤다. 하지만 하정이는 그저 뒤만 살짝 돌아봤을 뿐, 내가 있는 곳에는 오지 않았다. 나는 왠지 서글픈 느낌이 들어 그 자리에 앉아 웅크렸다. ‘같이 놀아도 친한 친구들끼리만 어울리는구나.’


그때였다. “잠깐, 타임!” 민지가 타임을 외쳤다. 무슨 일인지 바라보니 민지가 무언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하정이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인 지 무척 궁금해졌다. “드디어 왔어.” “그래, 이제 오셨군, 내가 알아서 할테니 넌 지연이나 잘 조종해” “알았어” “뭐야. 대체 무슨일로 그러는거야?” 나는 나를 따돌리는 느낌이 들어 새치름하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민지가 미안하다며 내게 다가오더니 나와 같이 움직이고 싶다고 하였는데 내 팔을 꼭 붙든 민지가 왠지 귀엽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핏, 웃음이 나왔다. 설움은 눈 녹듯 사라진 느낌이었다.


“지연아, 앞에, 앞에!‘ “어? 으응!” 어느새 하정이가 우리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그만 하정이가 휘두르는 팔에 맞을 뻔 하였지만, 그래도 무척 재미있었다. “민지야, 내 뒤로 숨어!” 나는 제법 씩씩한 말투를 내며 민지의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아, 항상 이렇게 같이 뭉쳐 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민지의 온기를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따뜻하고 포근해서 마치 꿈을 꾸는 듯 했다. 행복했다.


그때였다. “뭐야. 황지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디선가 날카롭게 다가온 말 한마디가 잠시 동안의 내 행복을 깨뜨렸다.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한 여자아이가 나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헉..!” 민희였다. “흐흠! 벌써 시간이 다 되었네. 우리는 이만 가 볼게” 하정이는 민희를 보고 미소를 띄더니, 헛기침을 하며 작게 말했다. 나는 갑자기 떠나는 민지와 하정이에게 당황하여 둘을 불러 세웠지만, 내가 소리쳤을 땐 이미 아이들은 저 멀리로 사라진 후였다.


‘황 지연. 너 지금까지 뭐 했니?“ 민희가 좌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를 불렀다. 눈초리가 매섭고 목소리가 딱딱한 게, 평소의 민희 모습이 아니었다. “어, 어? 그냥 지옥탈출이라는 놀이...” 나는 어째서인지 민희의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 하질 못했다. “뭐야! 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헐레벌떡 뛰어온건데!” 갑자기 민희가 울부짖었다.


“...뭐? 무슨 소리야?” “모르는 척 하지마. 민지가 그랬어. 네가 공터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고. 민희에게 좀 알려 달라고 네가 그랬다고. 그래서 난 지금 학원도 빠지면서 너에게 달려온 거야. 넌 내 가장 친한 친구였으니까.” “아, 아니 그건..” 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민지에게 민희를 불러 달라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았다. 앙숙인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서 무엇이 이득이겠는가?


‘그렇다면, 민지와 하정이가... 거짓말을?’ 대충 상황이 파악되자, 모든 실마리가 조금씩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정이가 갑자기 내게 놀자고 한 것도, 두 아이의 준비시간이 상당히 길었던 것도, 하정이가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던 것도. 모두 다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였던가.


“야, 지연이 너 왜 대답을 못해? 역시 네가 배신 한 것 맞구나?” “아, 아냐. 그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꼴 보여줘서 날 약 올리려고 부른거야?” 민희가 다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순간 주춤 했지만. 민지의 말만 믿고 나를 몰아세우는 민희에게 나는 점점 짜증이 치밀기 시작하였다.


“야, 너야 말로 내가 가장 친한 친구라면 왜 내 말은 믿지 않고 민지의 말만 믿는 건데?” 나는 조금씩 올라오는 분노를 억지로 눌러 삼키며 말하였다. “그, 그야.. ” 민희는 내 바뀐 태도에 살짝 당황한 듯 하였다. 그러나 곧 “그럼 왜 자신있게 아니라고 말을 못 했어? 왜 더듬거렸냐고! 만약 너라면 내가 너처럼 말 했을 때 믿어줄 것 같아?” 라고 울먹이면서 말하였다. 순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너도 따돌림 당하는 내가 싫지? 같이 있으면 어떤 봉변을 당할 지 몰라 항상 불안해 하고.. 요즘 네 모습에 나 나타나 있어.” 민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낮게 말했다. 분을 참는 모양이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록 내 의지로 민희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에는 확실하게 싫다고 말하지 못한, 그리고 민지가 두려워 민희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한 내 잘못이 분명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다 내가 잘못한 거지 뭐.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 한 것 같아. 사람은 바뀌기 마련이잖아? 누구나 낡은 우정에 집착하고 싶진 않는 법이지” 민희는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대었다. 너무 소리가 작아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중간 중간 흘려 들어오는 내용은 내 마음을 콕콕 찌르며 아프게 조여왔다.


“나 갈게” 민희는 잠깐 서글픈 표정을 짓더니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소리 높여 민희를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민희야, 내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너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힌거니? 넌 얼마나 힘들고 아팠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니...?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민희가 가자, 민지와 하정이가 어디선가 슬쩍 나타나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지연아, 왜 민희에게 상처를 주니? 쯔쯔쯔..” 하정이는 뻔뻔하게도 오히려 나를 훈계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참고 참으며 쌓인 분노가 터질 뻔 하였지만, 내가 화를 내면 민지가 또 어떤 거짓소문을 퍼뜨릴 지 알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황지연, 이제 민희와도 완전히 깨졌으니, 넌 이제 전의 네 삶으로 돌아가면 되겠다.” “맞아!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모습으로, 킥킥!” 민지는 하정이의 말을 맞받아치며 킥킥 웃었다. “...그래. 그렇겠구나. 그럼 이만 나 먼저 가 볼께” 나는 하정이와 민지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저 아이들과 더 이상 함께 있기 싫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오늘 사건은 비밀로 해 줄게” “어서 어서 돌아가!” 민지는 나를 등 떠밀었다. ‘안그래도 간다. 이 계집애들아!’ 욕을 하고 싶었지만, 참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차갑게 식은 콘크리트 바닥이 당장이라도 딱딱한 목소리로 “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라고 따져 물을까 겁이 났다. 다, 내 잘못인 것 같다.


4. “민희를 괴롭히는 거라면, 난 빠지겠다는 거야.”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아, 한 숨도 못잤네.” 어제 낮에 벌어졌던 민희 사건이, 악몽으로 다시 다가와 나를 밤새도록 괴롭혔다. 미안함과 두려움에 발버둥친 게 한 두 시간이 아니었다.


‘민희는 와 있을까? 어제 일로 내게 단단히 실망했겠지..’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남은 시간 동안 민희의 얼굴을 보며 생활할 일이 생각만 해도 괴롭기만 했다. “헤이! 친구. 무슨 한숨을 그렇게 땅이 꺼져라 쉬는 거야?”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뒤를 돌아보니, 같은 반 송이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아, 송이야..” “왜 그렇게 저기압이야? 내게 맘 놓고 이야기 해 봐, 응?” 송이는 내 표정을 보고는 마치 제 일인 양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다른 여러가지 일로 걱정이 많을텐데 내게 신경 써 주는 송이가 오늘따라 참 고맙게 느껴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민희 사건은 꺼낼 수 없었다.


‘내가 지금 솔직히 이야기해 봤자 반에 들어가면 민지가 뿌린 헛소문 때문에 송이도 날 거짓말쟁이로 생각하겠지’ 진실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내 자신이 보기에도 한심스러웠다. 다른 아이들이 내 사정을 안다면 날 겁쟁이로 생각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내게는 지금 주위 시선에 신경 쓸 만한 여유 따위는 있지 않았다. ‘그래, 난 겁쟁이다’


“지연아? 지연아. 너 괜찮니?” “어, 어어?” 아차,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송이가 날 부르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어쩐다, 송이가 화낼 지도 모르는데... “어휴! 정신 좀 차려!” 송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일부러 듣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듯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미안해, 송이야” “어쩔 수 없지. 괜찮아.” 내가 사과를 하자, 송이는 다시 새치름했던 표정을 풀고 활짝 웃었다. 송이의 웃음을 보자 나 역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감돌게 되었다. 계속 민희 일로 어둡기만 한 얼굴이었는데 말이다. 송이가 참 고마웠다.


‘후우... 벌써 교실 앞까지 왔구나’ 밤색 나무 문 앞에 서자. 다시금 불안감이 밀려왔다. “드르르륵ㅡ” 긴장된 마음으로 교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이들이 모두 다 나를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모두 서로 장난치기에 여념이 없는 것 이었다.


‘이상하다. 민지가 말을 안 했나? 평소와 다름이 없는 모습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기뻤다. “휴우, 어쨌거나 왕따 신세는 면한 것 같네” 나는 내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나지막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야아, 지연아. 너 그 얘기 들었어?” 내가 자리에 앉자, 내 자리 뒤에 앉은 소연이가 급하다는 듯 나를 불렀다. “뭔데?” 희영이 아까 민희를 놀렸는데, 민희가 발악을 했나 봐, 말싸움에서 져서 자존심 상했는지 희영이 아까 울먹이고 난리났더라. 그래서 누리가 1교시 쉬는 시간에 우리 반 여자애들 모두 화장실로 오래“ “아......그래?” “그렇다니까! 분명 민희에 대한 말 일꺼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희도 눈물 참아가며 바락바락 소리지르더라고,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던데.” “....응, 그렇구나. 고마워” 나는 다시 내 책상 쪽으로 돌아 앉았다. 분명히 나 때문에 그렇게 바뀐 거겠지, 민희야.


“딩-동-뎅-동”

“야! 수업 마쳤어. 빨리 화장실 가자” 여학생들이 우르르 화장실로 몰려나갔다. 나도 늦을세라 무리에 끼어들어 갔다. 분명 누리의 말을 들으면 마음은 더 착잡해지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 내용이 궁금했다.


“야! 빨리빨리 안 들어와? 마지막 들어온 사람은 문 잘 닫고!” 누리가 가시 돋힌 말투로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내었다. 화장실 안에 있던 다른 반 아이들은 민지와 정윤이의 손에 이끌려 내쫓기고 말았고, 결국 여자화장실 안은 우리 반 아이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다 모였어? 그럼 말할게” 민지는 패거리들을 자신의 양쪽에 두고, 한 발짝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대통령이 여러 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리고 가는 모습처럼 당당하고 기품있게 보여, 나는 잠깐이었지만 민지의 행동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얄미운 민희 때문에 우리 친구 희영이가 상처받았어. 그 애를 가만둬선 안될 것 같아.” 정윤이가 곁에 있던 희영이를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희영이는 아직까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훌쩍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민희를 아예 저 나락으로 떨어트려 버리자는 거야. 그리곤 모른 척 하는 거지. 그래서 일단 우리 파 이름을 ‘서리’로 하기로 했어. 이 계획을 생각해 낸 나와 민지의 이름을 합해서 만든 거고, 왠만해서는 민희에게 들키지도 않을 꺼야. 알더라도 그 애가 무슨 힘이 있다고 우리들에게 따지겠어?”


누리도 한마디 했다. “우리들이 모두 힘을 합치면 그 꼴 보기 싫은 서민희를 내쫓을 수 있어. 다들 이의 없지?” 민지는 누리를 바라보더니 다시 우리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크게 말했다. 몇몇의 아이들이 이 일에 끼고 싶지 않은지, 좋지 않은 표정을 보였지만 우물쭈물할 뿐 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민지가 마치 ‘어디 손 한 번 들기만 해 봐. 너 역시 서민희와 같은 신세가 되게 해 주겠어’ 라고 하듯 매서운 눈초리로 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나, 난 어떻게 하지?’ 나 역시 민희를 따돌리는 일에 같이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면 어떤 결과가 돌아올 지 몰랐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민희를 배신하기는 죽기 보다 싫었다.


‘에잇!’ “음..?” 민지가 무언가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바로 친구들 사이에서 우뚝 솟은 내 손 때문이었다. 민지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아이들 역시 나를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갑자기 싸늘해 진 분위기에 지금이라도 손을 내릴까 생각해 보았지만 이미 한번 엎질러진 물. 난 이제 와서 모든 걸 되돌릴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용기 내어 빳빳이 손을 들고 있었다.


“야.., 황지연. 너 뭐야?” 민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나, 난 벌써 한 번 민희에게 상처를 주었어. 하지만 또 다시 아픔을 안겨주긴 싫어. 이 모임의 결론이 민희를 괴롭히는 거라면, 난 빠지겠다는 거야” ‘뭐, 뭐라고?“ 단도직입적인 내 말투에 민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리고 서리 아이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아이들이 나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몇몇의 아이들은 내게 ‘민지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다니, 나도 저렇게 하고 싶어. 부럽다’는 마음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아마 평소 민지에게 앙금이 쌓인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좋아, 너 알아서 해. 후에 어떻게 되든 우린 모르니까 어서 나가” 민지는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는 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문을 가리켰다. ‘흥, 나가라면 못 할 줄 알고?’ 나는 민지의 말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나가려니 마음이 착잡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등에 꽂히는 무수한 시선들을 견디면서까지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 따윈 없었다.


“끼익” “쾅!” 문을 열고 한 발짝 떼기도 전에 뒤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쳇. 갑작스레 닫아서 내가 다칠 뻔 했는데도 누구 하나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니.


“쟤 너무 재수없다” “세상에. 민희 편을 들다니” 화장실 밖으로 쫓겨나자, 안에서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의 학교 생활이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결코 내가 틀린 선택을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겁던 마음이 홀가분 했다. “그런데, 정윤이도 날 부럽다는 시선으로 본 것 같았는데, 내 착각이었나?”


“자자, 이제 곧 여름방학이 멀지 않았구나. 내일부턴 단축 수업하니까 잘 알아두도록 해라.” 시간은 흘러 어느덧 종례시간으로 들어섰다. 내겐 좋은 일이었지만, 어쩐지 수업이 끝나면 민지가 날 부를 것 같아 불안한 마음도 적잖이 있었다. ‘민지도 참 너무하다, 민희 편을 들어 주었다고 해서 나까지 꼭 따돌림을 당해야 하는거야?’ 나는 옆 분단에 앉은 민희의 옆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깨에 닿는 까만 단발거리, 황갈색을 띈 맑은 눈망울, 아무리 봐도 보통 학생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인 데.


“자, 그럼 이만 하교 하도록 하자, 오늘은 자유 하교! 청소 당번만 남고 이름 적힌 사람들도 모두 가거라” “와아-!”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나도 오늘은 일찍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하필이면 청소 당번으로 1인 1역이 바뀌어 급식을 먹은 후 지저분해진 교실 뒷바닥을 청소해야 했다. 그래도 같이 청소를 하는 당번이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적어도 기분 나쁘다는 눈빛을 느껴가며 청소를 하지는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웃-샤!” 나는 청소용구함에서 커다란 철통과 대걸레를 꺼내어 화장실로 들고 갔다. 금속 재질로 만든 물건들이라 그 무게가 만만찮았는데, 그래서 평소에는 밖에서 날 기다려주던 송이와 함께 옮기곤 하였지만 오늘은 복도에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치사한 김송. 민지 때문에 친구를 버리고 가다니’ 나는 서운한 마음을 안고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정윤이가 세면대 곁에 기대어 나를 보고 있는것이 아닌가? ‘뭐, 뭐지? 또 할 말이 있나?’ 나는 바짝 긴장하여 정윤이를 보았다. 그런데 오늘 정윤이의 모습은 평소 때와 조금 달랐다. 언제나 활기차고 당당했던 유정윤은 없고 얼굴에는 슬픈 듯한 눈매만이 남아있었다.


“저, 정윤아.. 여기서 뭐하니?” 나는 혹시 정윤이가 쉬는 시간 때 있었던 화장실 사건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용기내어 말을 걸어보았다. 그러자 정윤이는 “응, 네가 오기를 좀 기다렸어. 시간 좀 내어 주겠니?” 라고 말하였다. 내 예상이 맞았다.


“으응.” 나는 철통을 세면대 입구에 놓고 물을 틀며 말했다. 쏴아쏴아.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가 가느다란 내 목소리를 묻어 버렸다. “나 있잖아. 화장실에서 네가 참 부러웠어. 존경스럽기도 하고.” 정윤이가 철통에 담기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살짝 감았다.


“설마. 내가 민지에게 대들어서 그렇다는 거니?” “응...” 예상은 했었지만, 실제로 정윤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나도 무척 놀랐다. 설마 서리 아이들끼리 싫어하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윤이의 표정은 너무나 태연하기만 하였다.


“나랑 민지는 5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민지는 너무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해서 좀처럼 아이들과 친해지지 못 했었거든. 그래서 6학년 때는 자기를 우습게 본 아이들에게 복수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새 학기가 되자 놀랄 만큼 달라 진거야....” “어, 어떻게?”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머리 모양도 달라졌고, 입는 옷도 달라졌고.. 촌스러운 5학년 때와 달리 무척 예뻐져서 돌아왔다고 보면 돼.”


나는 정윤이의 말을 들으며 민지의 5학년 시절을 상상해 보았다. 수수하고 소박한 민지라니.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질 않았다. “민희와 민지는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집이 가까워서 평소 자주 마주쳤거든. 그런데 6학년이 되어 같은 반이 되자 민희가 민지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해 버린거야. 민지 성격에 가만히 있었겠니?” 정윤이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는 듯 했다.


“그 말이 뭐였는데?” “나도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너 확 달라졌네. 예쁘다. 전엔 나랑 비슷하게 입고 다녔었는데, 하하!’ 라고 했었던 것 같아.” “세상에! 겨우 그말 때문에 민희가 따돌림 당하고 있는거란 말이야?” 나는 황당한 나머지 큰 소리로 정윤이를 다그치고 말았다. 이까짓 말 때문에 민희가 괴롭힘 당하는 것도 그렇고, 이런 걸 몇 달 동안 알지 못한 나 자신도 한심했다.


“.....그렇지?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민지가 자존심이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걸 어쩌겠니.” 정윤이는 놀란 눈으로 날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저, 있잖아. 너 민희를 도울 작정이지?” 정윤이는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잠그며 말하였다.


“응. 왜?” “나도 네 편에 서고 싶어” “뭐어?” 나는 살짝 주춤했다. 정윤이가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모든 걸 알려주는 척 하면서 뒤로는 민지가 보낸 스파이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 하지만. 그러면 너 역시 우리처럼..”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정도 각오는 하고 너에게 말한 거야, 난 민지가 싫어. 착한 척, 고상한 척하면서 뒤에서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짓밟아 줄지만 생각하는 정말 대단한 이중인격자지. 나 말고도 민지를 싫어하는 서리 아이들은 많아. 실제로는 누리와 하정이도 민지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정이도?” 어제까지만 해도 민지와 다정히 붙어 지내던 하정이가? “그래. 내 말 좀 믿어줘. 난 정말 너희쪽에 붙고싶단 말이야.” 정윤이는 호소하듯 말했다. “그, 그래. 알았어.” 정윤이는 내가 승낙하자, 환한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 모습은 평소 민지의 오른편에 붙어 차가운 표정으로 민희를 쏘아보던, 학급에서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저기, 정윤아. 물어볼 게 있는데” “뭔데?” “원래 네 성격이 학교에서의 모습 같이 차가운 건 아니었지?” 나는 정윤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정윤이 모습과 반 안에서의 모습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 정윤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미안, 내가 잘못 말을 꺼..” “어떻게.. 알았어?” “어엉?” “맞아. 난 원래 지금 이런 성격이야. 소심하고, 외로움 많이 타고, 그런데 민지가 날 변화시켜 주겠다면서.. 민지 같은 성격이 되는 건 싫었지만 민지가 무서워서 계속 민지를 따라 했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반에서는 민지가 가르쳐 준 성격으로 내가 돌변해버리는 거야. 나도 지금 이런 내가 싫어. 이것도 내가 민지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고”


“아아.” 나는 참 민지 때문에 피해 입은 아이들이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아이들이 늘수록 하루빨리 민지를 저지해야 한다는 다짐도 불어났다. 나약하고 힘 없던 내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몸도, 마음도 부쩍 자란 느낌이었다.


“지연아, 나 먼저 갈게. 학원에 가야 해서” “으응. 잘가” 정윤이는 화장실 밖으로 뛰어 나가면서, 나를 돌아보며 옅은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기분이 좋아져 정윤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행복했다.


5. 역전


“흥흥흥~ 흐흥~” 저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아침이었다. 맑고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뭉게구름, 마치 다가와 나를 안아주 듯이 무척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흐흥~ 매일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뭐가 그렇게 신나는데?” 딱딱한 고주파 목소리가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민지가 팔짱을 끼고 서리 아이들과 함께 오고 있었다. ‘안녕 지연아’ 정윤이가 아이들 뒤에서 몰래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했잖아.” “아아, 그냥 좀..” 민지가 내 두루뭉실한 대답을 듣고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확실하게 대답을 해야지” “그냥 파란 하늘을 보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그래” 나는 부루퉁한 태도로 다시 대답해 주었다. 내가 왜 이런 것까지 민지에게 일일이 말해야 하는 거야?


“그래, 알았어” 민지는 내가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듯 나를 노려보다 홱 돌아서서 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누리와 희영이가 민지의 양쪽에 서서 따라가고, 하정이는 정윤이 뒤에서 쌤통이라는 듯 나를 놀렸다. “호호, 넌 이제 끝났어. 민지가 그렇게 신경 써서 물어줬는데, 그렇게 밖에 대답을 못하니?” “하정아, 잠깐 나 좀 봐” 나는 지금의 하정이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민지가 싫은 마음을 눌러 참고 민지의 시녀처럼 행동할 수 밖에 없는 하정이. 서글픈 입장의 임하정.


“왜, 왜?” 하정이는 갑작스러운 나의 태도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나는 하정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하정아. 너 힘들지 않니?” “어엉?” 하정이는 ‘얘, 왜 이러니?’ 라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하하... 내가 말해줄게” 정윤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하정이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 이야기했다.중간에 드문드문 하정이가 정윤이에게 화를 버럭 내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내 하정이는 고개를 떨어트리며 내 쪽으로 왔다.


“너, 알고 있었던 거야?” “어... 정윤이가 가르쳐줘서” 하정이는 ‘유정윤 너!’ 라는 눈빛으로 정윤이를 쏘아보더니 이내 “하긴, 정윤이가 옳아. 나도 하루빨리 민지를 벗어났으면 좋겠어. 놀이터 사건도 너에게 정말 미안했는데, 민지가 하도 하라고 윽박 질러서..” 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하정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이 있기 싫지만, 좋아하지 않지만, 함께 있어야 하는 그 심정. 언제나 두려움 때문에 말 한 번 제대로 해 볼 수 없는.


“저어, 누리도 민지를 꺼려한다던데..” “알고 있구나? 맞아. 누리도 나랑 같은 입장이야” 하정이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정아. 왜 그렇게 침울해하니” 정윤이가 하정이 뒤에서 어깨를 가만가만 두드려 주었다. 곱슬거리는 유정윤의 긴 머리가 하정이의 어깨를 간질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뜻이 같아도 과연 민지를 밀어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 때문에.” 하정이는 왠지 모를 지친 눈매로 우리를 번갈아보았다. “...!” “하긴 사실이긴 해.” 정윤이가 긴 한숨을 쉬며 맞장구쳤다.


‘음.. 과연 그럴까..?’ “그런데 황지연 너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하정이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나를 보고 한마디 했다. “하정아, 너희 팀 ‘서리’ 라는 게 무슨 뜻이야?” “뭐?” 하정이는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당황하여 재빨리 말을 하지 못했다.


“그, 그러니까. 민희 골탕먹이기 계획을 생각해 낸 민지와 누리의 이름을 합쳐서 만든 이름이야” “형편없는 이름이지” 정윤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가 더 좋은 팀 이름을 만들면 되잖아?” 나는 눈을 반짝이며 아이들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어차피 세력으로 안될 바에는 민지의 악행을 반대하는 팀을 만들어 몰아붙이는 게 좋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둘 다 “에이, 설마 서민지가 그런 작은 팀에 밀리겠어?” 라고 말하며 반대하였지만, 우리 반 대다수의 여학생이 민지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점점 내 의견은 현실로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으음. 그럼 이름은 어떻게 정하지?” “민지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민사모 어때?” “자칫하면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너무 단순한 것 같아.” “이 정보가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민지는 미용에 좋다면서 오이 팩, 토마토 팩 같은 야채 화장품을 많이 쓰곤 했어” “정말? 그런데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관련이 있니?.” “그러니까, 이 일을 이렇게..” “아..그러면 여기를...” 우리들의 비밀 회의는 장장 15분 동안 계속 되었다. 그 때문에 학교에 지각하고 말았지만, 기분은 매우 좋았다. 완벽한 팀 이름을 정했기 때문이다.


‘후훗! 이제 곧 우리들의 꿈을 이룰 때가 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자, 이제 대충 모양이 만들어진 것 같아. 그런데 무언가 부족한 것 같은데..” “인원이 적어” 하정이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우리를 번갈아보면서 말했다. “인원을 하루빨리 모아야 해. 곧 있으면 가을 학예회란 말이야.” “에이, 아직 10월까지 두달이나 더 남았는데 뭘 그래.” 나는 정윤이의 말에 손을 내저으면서 웃었다. 하지만 정윤이의 표정은 웃음기 쏙 빠진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아니야. 민지는 곧 우리들 데려다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시킬 거야. 내가 걔 사물함에서 대본을 봤어. 나와 하정이, 그리고 누리 이름이 적혀 있던 걸” “그 계집애! 자기만 돋보이려고 우리를 깎아내리려 해!” 하정이가 정윤이의 말을 받았다. “어쩜 그럴수가...” “지연아. 이제 알겠지? 우리는 적어도 학급 여자 아이들의 절반을 넘어야 해. 10명도 안 되는 애들 데려가 봤자 뭘 할 수 있겠니?” 정윤이는 답답한 듯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며 내게 외쳤다.


“내가 가서 누리 데려올게. 지연이 넌 아무나 친한 친구 한 명 맡아 줘” 하정이는 조금 전 누리가 나간 운동장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정윤이도 친구를 데려오기 위해 반으로 뛰어들어 갔는데, 나는 아이들이 모두 가 버린 후에도 좀처럼 마땅한 아이가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자. 나랑 같은 생각을 가졌으면서 우리 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잘 참여해 줄 친구라면...’ "지연아.“ ‘누가 적절할까? 아아. 머리 아파’ “지연아!” “으응?”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에 송이가 서 있었다. 몇 번 불렀는데 내가 알지 못해서 화가 났다는 표정이었다.


“송이야. 나 불렀니?” “그래! 심심해서 같이 놀자고 불렀는데, 넌 모르는 척 하고..” 그때, 떠올랐다, “그래! 송이야! 바로 너야!” “응? 뭐가?” 송이는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네가 가장 적당한 아이야. 가자! 협조 좀 해 줘” 나는 급한 마음에 제대로 이야기 할 틈도 없이 송이의 팔목을 잡고 화장실로 끌었다.


“아니, 아니 지연아! 무슨 일인지나 좀 말해!” 송이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걱정 마.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송이가 불안감을 갖지 않도록 차근차근 사건을 말해주었다. 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송이의 표정은 계속 다양하게 바뀌더니, 끝내는 공감한다는 얼굴로 끄덕거렸다,


“그래, 그런 거라면 내가 뒤에서 밀어줄게. 나도 민지 걔 싫었는데 잘됐다” “헤헤.. 고마워 송이야” 나는 후에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위험천만한 일에 날 믿고 몸을 맡긴 송이가 그저 고마웠다.


“지연아! 데려왔어” 저 멀리서 하정이와 정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둘이서 누리의 손을 잡고 내 쪽으로 데려오고 있었다. “설득했어?” “당연하지!” 하정이는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보내며 윙크를 했다. 나도 하정이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뭐. 별로 내키진 않지만 한 번쯤 도와주는 것도 괜찮지” 누리는 날 보더니 살짝 얼굴을 붉히며 짧은 옆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이 평소 누리 답지 않게 참 귀여웠다.


“이제 몇 명이나 더 남은거지?” “적어도 열 명은 더 모아야 겠네." 정윤이가 잠시 생각하더니 막막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휴.. 과연 다 모을 수 있을까..?” 누리는 힘 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때. “시작부터 풀 죽으면 안 되지. 겨우 그까짓 거. 지금부터라도 모으면 되잖아!” 송이가 기운 없어 하는 아이들을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침울해 하던 정윤이와 누리는 점차 놀란 표정에서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아이들도 하하,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송이 말이 맞아. 제대로 시도도 해 보지 않고 좌절하는 건 나약한 짓이다. “좋아! 열흘 이내로 인원을 모집하자. 부당한 우리 반 독재자를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예에!” 팔을 힘껏 위로 올리며 외친 내 말에, 모여 있던 아이들 모두 같은 행동을 취하며 소리를 질렀다. 복도를 왕복하던 아이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우리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 나흘, 그리고 약속했던 열흘째가 되었다. 쉬는 시간에 다시 화장실로 모여보니 우리 팀에 들어온 새 회원만 해도 무려 15명이었다. 그중에는 드문드문 다른 학급의 아이도 섞여 있었다.


“우와! 벌써 이렇게 많이?” 누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엄! 우리가 누군데” “그런데 이젠 빨리 계획을 실행해야 할 것 같아. 민지가 눈치채려고 해” 하정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속삭였다.


하정이의 말을 들어보니, 며칠 전 민지와 함께 시내에 나가게 되었는데 민지가 “하정아! 나 삼 만원만, 빨리!”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정이는 민지의 그 말투에 기분이 나빠져서 “싫어! 너 저번에 꿔간 돈도 안 줬잖아”라고 했더니, 민지가 화를 내면서 너 요즘 태도가 달라졌다고, 요즘 지연이와 어울리는 것 같던 데 설마 나 배신하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 가자. 민지 반 안에 있어” 송이가 내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냐. 하루만 더 기다리자.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대로 행동하고, 내일 몰아붙이는 거야” “그, 그래” 완고한 내 말투에 아이들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역시 내 의견만 내세운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하루빨리 민희를 괴로움 속에서 꺼내주고도 싶었지만, 그렇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나는 각자 반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외쳤다.‘제발, 제발 내일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우리 팀 아이들은 저마다 하나씩 무언가를 들고 반으로 들어왔다. 모두 내가 어제 부탁한 것들이었다. ‘가지고 왔어?’ ‘응’ 우리들은 다른 친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빛으로 조용히 말을 주고 받았다. 우리들의 역전은 바로 지금, 화려하게 펼쳐질 것이다.


“민지야. 잠시 우리 좀 볼 수 있을까?” 하정이가 남자 아이들과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민지에게로 다가갔다. 민지는 무척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잠시 뒤 하정이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왔다. 화장실 안에서는 나를 포함한 팀 맴버들이 민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지금 뭐하는 짓거리야?” 민지는 욕설을 내뱉으며 우리를 째려보았다, 평소에는 무섭던 민지의 눈빛이었지만 오늘만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학생’ 팀 아이들은 그저 너에게 할 말이 있을 뿐이야. ‘학생의 인권과 정정당당한 발언, 학교생활의 자유’를 줄인 이름인데, 어때? 우리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한 팀명이지.” 누리는 그에 맞서며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맑은 누리의 목소리가 고요한 화장실을 가득 울렸다.


“무슨 서론이 그렇게 길어. 할 말만 하지 그래?” 민지는 비아냥거리며 코웃음 쳤다. 그러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두려운 듯 흔들리고 있는것이 보였다. “너는 여태까지 우리 반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어. 뭐든지 네 멋대로 하고 우리를 시녀처럼 부려먹었어. 여기 있는 모든 아이들이 다 네 행동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걸.”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데모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 난 너 같지 않거든. 그저 네 썩어 들어가는 마음 씀씀이가 역겨워서 한마디 하는 것 뿐이야. 그리고 네 피라미드 반 신분 제도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데, 이제 널 저 위에서 끌어내리려고.”


“너... 착한 척하더니 역시 뒤에서 꼼수는 다 부리는 구나” 민지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는 민지를 보자니 애처로운 마음도 들었지만, 나는 내 주장을 꺾지 않았다. “아니, 나도 사람인 걸,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 착하면 말 못하는 거니? 그건 아니잖아. 그리고 눈이 있으면 한 번 봐, 서리니 뭐니 하더니, 네 가장 친하다는 아이들도 여기 있는데” 나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내 좌측에 있는 하정이와 누리를 가리켰다. 민지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충격 받은 표정이었다.


“이제 우리 반의 대장은 네가 아니야. 넌 혼자 그렇게 행동한 것 뿐이지. 우리가 인정이라도 해 줬니?또..” 나는 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민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짜잔’ 송이가 있었다.


‘어서 말해. 미안하다고. 그리고 다 털어내 버려’ 송이는 소리 없이 내게 외쳤다. 나는 쉽게 고백할 자신이 생기지 않았지만, 지금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민희가 내 사과를 들어줄 지 몰라 한편으로는 다 말해 버리고 싶었다.


“민지야. 이제 왕따니 뭐니, 그런 말은 없어. 너 때문에 죄 없는 민희는 고통 받았다고. 모든 건 널 생각해서 해 준 민희의 말에 민감하게 받아들인 네 잘못이었으니까.” “...” 민지는 말이 없었다. 살짝 수그린 고개 밑으로 물방울이 굴러 내려 와 반짝하고 빛났다.


“그리고 민희야..” 나는 용기 내어 민희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내 뒤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와 민희에게로 쏟아졌다. “정말, 정말 미안했어. 앞으로는 너에게 더 신경을 쓸게. 내 사과 받아줄래..?” 나는 손을 펴 모으고 인사하듯 고개를 숙여 사과하였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민희가 나를 용서해 주기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응” “뭐라고?” “알았다고.....” 민희는 속삭이 듯 말하며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왈칵하고 눈물이 터져 민희와 내 옷을 적셨다. “어흐흐윽...” 어깨가 들썩이고 내 울음소리가 격렬해져 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내 마음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빠져나오는 것이겠지. 곁눈으로 보니 민희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토닥여 주었다.


“내가... 너무 나빴어. 미안해 지연아.... 흐윽” 민희는 눈물을 삼키며 내게 말하다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민희도 마음 고생이 무척 심했으리라. 나는 화장지를 뜯어와서 민희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울지마.. 넌 언제나 씩씩했잖아” “지연아.. 정말 고마워” “...훌쩍” “.....흑” “허어어..” 어느새 화장실은 우리 둘의 말소리 뿐만 아니라 커져 가는 친구들의 울먹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눈가를 추스르고 보니 민지는 조금 전에 화장실을 빠져나간 뒤였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나는 이미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친구 한 명을 되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짝짝짝짝짝” “응? 왠 박수야?” “너희 둘을 위한 거야” “우리...를 위한?” “그래! 지연이 너 정말 대단했어.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민지를 제압할 수 있었니?” “맞아. 난 네가 정말 부러워” 아이들이 아낌없는 박수를 치며 내게 웃어주었다.


“민희도 정말 대단했어” “민희야. 지금까지 널 오해하고 있었나 봐. 앞으로 다시는 너를 무시하지 않을게. 미안해..” “나, 나도..” “...정말 미안했어” 아이들은 하나 둘씩 민희에게 사과하였다. 식상하고 예의 상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으응. 난 괜찮아.” 민희는 눈물자국이 남은 볼을 슥슥 문지르며 웃었다, 그때 나는 처음 보았다. 민희에게는, 그 누구도 표현할 수 없는 어여쁜 볼 우물이 한 쌍 있다는 것을.


“자자, 모두 새로운 우정과 학급의 새 출발을 위해 만세 삼창!”

“만세- 만세- 만세!” “하하하하하하...”


우리는 몰랐다. 왕따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왕따’ 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 아이들의 심정을. 하지만 지금은 안다. 모두 같은 사람이란 걸. 우리의 이름은 ‘왕따’ 가 아니라는 걸. 그 아이들도 느낀다는 걸. 기쁨, 미움, 섭섭함, 슬픔, 행복. 그리고 우정이 주는 사랑을.

배인혜 독자 (대구상인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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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원
서울신서초등학교 / 6학년
2011-08-04 15:53:55
| 우아~ 진짜 재미있어요!! 글도 정말 글고, 진짜 소설같아요! 앞으로도 많이 써주세요~ㅎㅎ
노영지
한울중학교 / 1학년
2011-08-05 20:22:39
| 와!정말 감탄사가 연발되네요. 소설가가 되어도 되겠는데요?
위상비
순천매산중학교 / 1학년
2011-08-05 22:02:56
| 지연이가 나중에 한 일들은 진짜 감동적이였어요.소설보다 더 재미있어요!!!!
추천 꾸~욱
이영경
염창중학교 / 1학년
2011-08-06 11:37:29
| 푹 빠져 읽었네요! 정말재밌어요! 담에도 기대할께요~
전인혜
대구대청초등학교 / 5학년
2011-08-06 12:44:48
| 정말 감동정이었어요. 민지가 지연이 한테 한 일을 읽을때는 민지를 엄청 혼내고 싶었어요.
김태은
교방초등학교 / 6학년
2011-08-07 21:14:51
| 저 감동했어요.실제로 일어나는 일 처럼 생생한데요!기대할께요^^
이채현
송현여자중학교 / 2학년
2011-08-09 21:37:26
| 2기 때부터 배인혜 기자님께서 동화를 참 잘 쓰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보다도 더 깜짝 놀랐어요. 배인혜기자님은 재미있는 사건들로 꽉찬 내용에 특유의 묘사까지 잘 해주셔서 마치 글을 읽은 게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를 본듯한 기분이 들어요^^ 정말 좋은 글 감사히 읽었어요,,추천하고 갈게요~
이화민
서울창도초등학교 / 6학년
2011-08-10 15:24:43
|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작가가 되면 정말 재미있는 글을 많이 쓰실 것 같아요~~
최윤서
서울영등포초등학교 / 5학년
2011-08-10 17:49:41
| 무척 감동적인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내용도 엄청 길~고, 정말 소설같아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앞으로도 감동적인 이야기 많이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추천 꾸욱 누르고요, 작가가 되셨으면 정말 잘 될 것 같네요^^
이미림
서울창도초등학교 / 5학년
2011-08-10 21:14:55
| 정말 재미있네요왕따가 되면 정말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그리고 책으로 내되 될만큼 잘 쓰셨고길고.... 정말 감동적이에요....이런 걸 어떻게 생각해내셨을지..........베인혜 기자님, 앞으로 즐거운 이야기 부탁합니다~!그리고 작가가 되시면 좋을 것 같네요(글도 무척 잘 쓰실 것 같고..)책 보다 재미있네요...
배민정
센텀초등학교 / 6학년
2011-08-12 00:12:17
| 우와 진짜 재미있어요... 말이 안나오네요ㅎ
장예빈
인천초은초등학교 / 5학년
2011-08-12 19:49:14
| 감동이네요.
장유정
청심국제중학교 / 1학년
2011-08-17 14:54:37
| 읽는데 20분 넘게 걸렸어요
정말 작가 같아요.
김예은
서울덕암초등학교 / 6학년
2011-08-18 19:52:51
| 흔히 생기는 문제인 왕따라는 문제로 이런 훌륭하고 멋진 글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솜씨가 장난아니신데요??
정선영
서울미아초등학교 / 4학년
2011-09-09 18:12:35
| 우와~정말 진짜 소설가 같네요.감동이고 무심코 들어와봤는데,어떤 감정 이든 빠짐 없이 꼬옥 껴안고 유유히 갑니다.정말 민지가 등장할 땐 씩씩거리고 민희가 등장 할때는 가엾으며,지연이가 등장할 때는 활약이 기대되는,그런 많은 감정들..책과 이야기 속에서 이런 것들을 나눌 수 있다는건..정말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정선영
서울미아초등학교 / 4학년
2011-09-09 18:15:44
| 요?정말 당신을 최고의 드라마같은 감정동화 작가 기자로 인정합니다!!~
ps:우리...우리학교였다면 좋았을 텐데요..휴우,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 같아요.저도 이런거 매우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저와 다르게 글씨 하나 안 틀리시구~YOUR BEST!
이도경
한밭초등학교 / 6학년
2011-09-13 23:02:53
| 우와.. 길긴 기네요. 본받고 싶습니다. 홧팅!
임연교
길주초등학교 / 5학년
2011-09-23 20:43:04
| 저도 만약 학교에서 왕따가 생기면 그런 방법으로 당당하게 대처해야겠어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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