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교 기자 (서울창도초등학교 /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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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金同) 아저씨는 세종대왕의 증손자인 강녕군 ‘기’ 할아버지의 노비입니다. 노비는 평생을 그 집안에 살면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사람 대접을 받기보다는 물건처럼 재산 취급을 받았어요. 그런데 금동이 아저씨는 비록 노비의 신분이지만 머리가 영특했었나 봐요. 검게 그을린 얼굴에 깡마른 작은 체구의 금동이 아저씨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집안일을 내 일처럼 부지런하게 일했어요. 그래서 집안의 주인인 강녕군 할아버지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요. 그리고 금동이 아저씨는 손재주가 남달랐어요. 작은 나무와 화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가꿔서 계절마다 화려한 꽃을 피웠어요. 그러다보니 자연히 집안의 정원이 참 아름다웠지요. 마침내 온 동네의 자랑거리가 되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을 지나던 기녀(妓女 : 춤과 노래를 하는 관청의 노비)가 우연히 강녕군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정원을 보게 되었어요. 온갖 꽃들로 벌과 나비를 모으는 예쁜 정원을 본 기녀는 그 아름다움에 푹 빠졌어요. 그리고는 그 정원을 갖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이 기녀는 백성들과 나랏일은 돌보지 않고 매일 같이 연회를 베풀어서 나라를 어지럽힌 조선의 제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총애를 듬뿍 받는 기녀였어요.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욕심 많은 기녀는 아름다운 정원을 차지하고 싶어서 며칠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가 되었어요.
다음날 기녀는 임금인 연산군에게 강녕군이 자기를 욕하고 다닌다는 거짓 이야기를 일러바쳤어요. 화가 난 연산군은 즉시 강녕군 할아버지와 금동이 아저씨를 잡아서 고문했어요. 충성스러운 노비인 금동이 아저씨는 “죄는 종에게 있을 뿐 주인께선 전혀 모르시는 바입니다.”하면서 모두가 자기의 잘못이라고 말했어요. 연산군은 할 수 없이 강녕군과 아들, 형제들을 멀리 귀양을 보냈고 끝까지 고문 받던 금동이 아저씨는 낙형(뜨겁게 달궈진 쇠로 몸을 지지는 무서운 형벌)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되었어요.
마침내 연산군의 못된 정치를 견디지 못한 의로운 사람들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임금을 왕으로 추대했어요. 그리고 남해의 외딴섬으로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떠났던 강녕군 할아버지의 가족과 형제들은 3년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쓴 채 세상을 떠난 금동이 아저씨를 집안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무덤을 만들어주었어요. 후세의 사람들은 그 무덤을 충성스런 노비의 묘란 뜻으로 ‘충노금동지묘’라 불렀어요.>
이 이야기는 거의 아는 사람들이 없는 도봉구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동화로 꾸민 것이다. 도봉구청 문화관광과에서 근무하시는 이종수 관광진흥팀장님께서 알려주신 이야기이다.
나는 9월2일(금)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푸른누리 취재수첩을 챙겨서 금동이 아저씨의 묘가 있는 도봉구 도봉1동 531번지 무수골로 향했다. 그 지역에 사시는 할아버지들께 여쭙고 또 여쭈어 마침내 찾아간 금동이 아저씨의 묘를 본 나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주인을 대신해서 죽은 충성스런 노비였는데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왕의 친인척으로 보이는 양반들의 큰 묘가 많았는데 금동이 아저씨의 묘는 그에 비하면 너무 초라했다. 그나마 비석이라도 없었다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쳤을 입구의 첫 번째 공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금동이라는 충성스러운 노비가 없었다면 강녕군 할아버지는 연산군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죽어서도 신분을 차별받는 것 같아서 조금 화가 났다.
비석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직사각형의 모양이 아니었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금동이 아저씨의 비석은 호롱불 모양을 하고 있었다. 또는 딸랑딸랑 소리 나는 작은 종 모양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이종수 팀장님의 말씀으로는 혹시 이 집안의 종(노비)이었다는 뜻으로 소리나는 종의 모양으로 비석을 세운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는데, 지금 향토사학자들의 검증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나는 금동이 아저씨께 인사를 드렸다. ‘아저씨, 저는 푸른누리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서울 창도초 정은교입니다. 아저씨의 충성심을 많은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취재하러 왔지만, 왠지 앞으로 아저씨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너무 외로워하지 마세요. 다음에 무수골 지나갈 때 꼭 들릴게요.’ 밝게 인사는 드렸지만 돌아오는 길은 찾아갈 때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하루 빨리 금동이 아저씨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져서 작고 초라한 묘도 멋지게 장식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동이 아저씨의 묘는 창동역이나 도봉역에서 8번 마을버스를 타고 무수골에서 내리면 걸어서 15분 거리이다. 무수골 텃밭을 지나 성신여대 난향별원을 지나면 만세교가 나온다. 그 곳에서 고개를 들면 느티나무가든이 보인다. 느티나무가든 앞마당을 지나 100m쯤 오솔길을 올라가면 충노금동지묘 안내판이 나온다.
정은교 기자 (서울창도초등학교 /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