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린 나누리기자 (이리모현초등학교 / 6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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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9일 익산 솜리문화예술회관에서 세계 유일의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인 ‘하트 체임버 오케스트라’(단장 이상재)가 ‘영화 속 감동’이란 주제로 공연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는 ‘피가로의 결혼’ 서곡,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주제곡, 영화 ‘여인의 향기’ 주제곡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을 연주하였고, 송연희 무용단의 탱고 공연까지 어우러져 멋진 공연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트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단장인 이상재 단장님은 공연 중간마다 살아오신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술래잡기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77년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가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우연히 듣게 된 클라리넷 소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클라리넷 연주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서울맹인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관현악과를 거쳐 1991년 미국 3대 음악대학 가운데 하나인 존스 홉킨스 대학교 피바디 음악학교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시각장애인으로서는 140년 역사상 처음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피바디 음대를 비롯하여 21년 6개월 동안의 기숙 생활을 한 그는 “단체로 주는 밥을 21년 반이나 먹었으니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죠”라고 웃으며 그때의 일을 회상하였습니다.
귀국 후 2008년 나사렛대 전임 교수로 임용된 그는 ‘이상재의 편지’ 외 3개의 음반을 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 명이 연주하는 것이 1이면 열 명이 모여서 연주하는 것은 10이 아니라 백, 천,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2007년 3월 하트 체임버오케스트라를 창단하였습니다.
기자는 이상재 단장님을 뵙고 인터뷰를 요청하였습니다. 단장님께서는 웃는 얼굴과 친근한 목소리로 기자를 맞아 주셨고, 인터뷰에 응해 주셨습니다.
기자 : 이상재 단장님의 부모님께서는 이상재 단장님께 어떤 도움을 주셨나요?
이상재 단장 : 어머니께서는 제가 공부를 하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고, 월남전 참전용사이신 아버지가 전장에서 돌아오시면서 클래식 음반을 많이 사 오셔서 저도 자연히 클래식과 친숙해지게 되었습니다.
기자 : 장애우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가장 아쉬우신 점은 무엇인가요?
이상재 단장 : 다리가 불편한 분들이 걸을 수는 없으나, 그것 때문에 사무 보는 일을 할 수 없지는 않습니다. 몸이 조금 불편한 것 때문에 다른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나쁜 선입견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어떤 공연인가요?
이상재 단장 : 20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치러진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기 추모식에 국내 음악가로서 유일하게 행사에 참석하여 ‘선구자’ 등의 곡을 연주했을 때 가슴이 정말 뭉클하였습니다.
기자 :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부탁합니다.
이상재 단장 : 어린이 여러분이 각자의 역할 아래서 못 가진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상처가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사회가 좀 더 평등해지고, 고통받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재 단장님께서는 점자악보를 사용하시기 때문에 악보를 통째로 외워야 하고, 자신이 원하는 악보를 모두 구할 수 없다는 점이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곡을 어디에서나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게 하려면 최소 100번의 연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음악이란 힘든 것이지만, 단장님께서는 음악을 통해 경험하고 느끼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 많은 것들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랜 인터뷰에 힘드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상재 단장님께서는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웃는 얼굴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상재 단장님의 웃음을 보고, ‘나도 어떤 상황에서든 단장님처럼 웃는 인상으로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상재 단장님께서 앞으로도 멋진 연주로 어려운 사람들, 상처가 있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린 나누리기자 (이리모현초등학교 / 6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