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리아 기자 (서울길음초등학교 /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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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의자이야기 (4) 부제 -잭 카운터와 토너를 만나다
세상에, 이 사람은 벌써 세시간째 꼼짝도 않고 내 위에 앉아있어요. 내 위에 앉아있다는 것을 나무랄 생각은 전혀 없어요. 난 의자인 걸요. 사람들이 내 위에 앉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죠. 게다가 이 사람은 망가진 나를 고쳐준 은인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약한 냄새까지 아무 말 없이 견딜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래봬도 난 제법 우아한 취향을 가진 노란색 의자란 말이에요. 한때는 시인도 내 위에 앉아 시를 썼던 고상한 추억도 가지고 있지요. 어쨌든 참는 수밖에요. 얼마나 고단했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꼼짝도 않고 잠들 수 있는 걸까요.
우르르 쾅쾅, 번쩍,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지요. 지붕이 들썩일 정도로 큰 천둥과 번개가 내려쳐요. 깜짝 몰라 눈을 감으려는 순간 갑자기 내 몸이 가벼워졌어요. 잠에 빠져있던 그 사람이 천둥소리에 놀라 그만 의자에서 떨어졌지 뭐에요.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불쌍하기도 하네요.
“아이구야.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대체 내가 얼마나 잔거야. 그나저나 비님이 오시는구나. 태풍처럼 거센 비님이야.”
머리는 마구 길러 산도적처럼 자란 주제에 비를 보고는 그냥 비라고 부르지 않고 비님이라고 공손히 부르는 것을 보니 역시 마음씨 하나는 좋은 사람 같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문을 박차고 나갔어요.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네요.
“하하하. 비님 좋다. 비님, 내 몸을 좀 씻겨주세요. 당신의 고운 손으로 이 더러운 몸의 때를 벗겨주세요. 비님. 나의 비님.”
그 사람은 도무지 부끄럽다는 말을 모르는 것 같아요. 늘 주머니에 비누를 갖고 다니는지 어느새 거품까지 내어 머리도 감고, 얼굴도 씻고 있어요. 세상에 넝마 같은 옷도 벗어놓고 이제는 아예 알몸으로 목욕을 하는데요. 이제껏 살면서 비에 목욕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그뿐이 아니에요. 그 더러운 넝마 같은 옷도 빨고 있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하기야 여기는 워낙 외진데다가 연쇄살인마의 집이었다는 소문 때문에 낮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은 없으니 다행이네요.
“아, 두 달 만에 목욕을 했더니 시원하군. 역시 나의 비님이 최고야.”
알몸으로 들어온 채 아무렇게나 옷을 바닥에 깔아둔 그 사람은 다시 내 위에 앉았지요. 누군가의 알몸이 내 위에 앉아있는건 처음이라 당황스럽긴 하지만 뭐 어차피 나는 의자인걸요, 그런데 한 가지 반가운 것은 더 이상 그 사람에게서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대신 향긋한 비누냄새가 났지요. 이제는 나도 비를 비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데요.
“내 이름은 말이야. 세상의 고독한 방랑자 잭 카운터야. 내 가는 곳엔 해님과 달님, 그리고 별님과 비님이 함께 하지. 어딜 가든 그들은 날 따라와. 나를 좋아하니까. 하하. 나는 세상의 고독한 방랑자 잭 카운터야. 하하하.”
이제야 이 사람의 이름을 알았네요. 잭 카운터, 그리 나쁜 이름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대체 누구한테 말을 하는 걸까요. 설마 의자인 내가 자신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걸까요. 아니면 혼잣말을 하는 걸까요.
“그러니 귀여운 토너야. 제발 이 아저씨를 걱정하지 말거라. 넌 그저 착하고 튼튼하게 잘 자라기만 하면 된단다. 네 부모님을 앗아간 원수는 내가 다 처리했으니 넌 그저 모든 것을 잊고 건강하게 자라면 되는 거야. 복수 따윈 이 고독한 방랑자 잭 카운터에게 맡겨두고 말이야. 하하하.”
복수와 원수라, 그럼 그렇지. 이 잭 카운터라는 사내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또다시 내 운명이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이 확 드는데요. 그리고 그 예감은 보통 딱 들어맞죠.
“여기 있었군. 잭 카운터. 네놈이 감히 우리 대장을 죽여 놓고 도망치면 못 잡을 줄 알았냐.”
느닷없이 들이닥친 무례한 세 사람은 모두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었어요. 그들은 알몸인 채로 앉아있던 그 사람을 향해 몽둥이를 날렸지요. 그 사람은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나를 번쩍 안아들었죠. 세상에 내 몸뚱이로 몽둥이를 막은거에요. 나는 너무 아팠지만 꾹 참아냈지요. 이런 것을 희생이라고 하나요. 아무튼 나를 방패로 몽둥이를 피한 그 사람은 순식간에 몸을 굴려 바깥으로 나갔어요. 그 덕에 나는 그들이 싸우는 구경을 할 수 있었지요.
알몸의 한 명과 몽둥이를 든 세 명의 사내가 쏟아지는 빗속에서 어울려 싸우는 장면을 구경할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어요. 알몸의 잭 카운터는 꼭 생쥐 같았어요. 그 많은 몽둥이들을 요리 슬쩍 조리 슬쩍하며 얼마나 잘 피하는지 정말 놀라울 정도였죠. 하지만 잭 카운터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어요. 얼마나 크게 숨을 몰아쉬는지 보는 내가 더 안타까울 정도였죠.
“아저씨. 이거 받아요.”
그때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가 겁도 없이 나타났어요. 그리곤 잭 카운터에게 커다란 몽둥이 하나를 던졌어요. 잭 카운터는 아이를 향해 윙크를 하며 몸을 날려 몽둥이를 받았죠. 잭 카운터의 손에도 몽둥이가 들리자 세 명의 사내는 당황했어요. 몽둥이를 든 잭 카운터는 아주 노련한 솜씨로 사내들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했죠. 결코 마구 휘두르는 솜씨가 아니었어요, 한명의 머리, 한명은 등, 한명은 다리를 맞고 그대로 꺼꾸러졌죠.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어요.
“너희 대장은 이 아이에게 못할 짓을 했다. 이 아이의 부모를 죽였어. 그래서 내가 대신 복수한 것뿐이다. 더 이상 내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다. 어서 사라져라. 그리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잭 카운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명의 사내들은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그 틈에 아이가 달려와 잭 카운터의 품에 안겼죠.
“토너야. 고맙구나.”
“아저씨가 제게 해준 걸 생각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닌걸요.”
“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것을 갚은 걸로 치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잭 카운터는 그제야 옷을 다시 입었어요. 토너는 그런 잭 카운터의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것은 꼭 아들이 아버지는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아저씨가 부끄럽구나. 네가 그렇게 쳐다보니 말이다.“아저씨, 저도 아저씨 따라다니면 안 될까요?”
“토너야. 이 잭 카운터는 세상의 고독한 방랑자란다. 때로는 물한모금 마시지 못한 채 사막을 헤매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아까처럼 무서운 싸움에 휘말릴 때도 있다. 너희 같은 아이들을 나처럼 살게 만들 수는 없지.”
“하지만 이제 저한테 아무도 없어요.”
“걱정마라, 마을 사람들이 너를 도와줄 거다.”
잭 카운터는 토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어요. 토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왠지 토너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은 늦었으니 이곳에서 자고 내일 마을로 돌아가거라. 아저씨는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날 거다. 피곤하구나. 오늘은 이만 자자.”
그 말을 끝으로 잭 카운터는 다시 내 위에 앉더니 깊은 잠에 빠져 버렸죠.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토너도 잠이 들었어요. 이제 집에는 잠든 두 사람과 잠들지 못하는 의자가 함께 밤을 보내고 있었죠. 그렇게 밤이 가고 아침이 왔어요. 햇살이 잭 카운터의 눈을 간지럽혔는지 잭 카운터가 번쩍 눈을 떴어요. 잭 카운터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소년 곁으로 갔지요.
“토너야, 부디 잘 살아야 한다. 복수 따위는 이제 잊어라. 내가 모든 걸 그대로 돌려줬으니 말이야.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아주 튼튼한 청년이 되어 있어야 한다.”
잭 카운터가 토너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돌아섰어요. 그때 소년의 손이 잭 카운터의 발목을 잡았어요.
“아저씨. 저도 따라가면 안돼요.”
“토너야. 사람은 갈 길이 다르다. 비록 너희 부모님의 원수를 갚은 거지만 난 살인자란다. 너와 같은 아이들이 나의 길을 동행할 순 없어. 너는 너의 길을 가야해.”
“다시는 안 돌아오실 생각이신 거죠?”
“토너야. 약속하마. 네가 훌쩍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반드시 널 보러오마. 이건 사나이의 약속이다. 그렇지 저기 샛노란 의자를 걸고 약속을 하마.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인디언의 후예다. 우리 인디언들은 의자를 걸고 한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킨다. 알겠지.”
“정말 돌아오실 거죠?”
“약속했잖니.”
“그럼 제가 바래다 드릴께요."
"아니, 넌 여기서 조금 더 잠을 자다 나오거라. 아저씨는 혼자 가는 길이 좋다. 나는 방랑자 잭 카운터니까.“
잭 카운터의 발목을 잡고 있던 토너의 손이 풀렸다. 잭 카운터는 그대로 걸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토너는 얌전히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가끔 어깻죽지가 흔들거리는 것을 보면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나는 의자다. 토너를 위로할 수도, 달래줄 수도 없다. 그저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어느새 해가 열린 문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을 때가 돼서야 토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바깥으로 나갔다. 문도 닫혔다. 이제 나는 또 혼자가 되었다. 모두들 그렇게 나를 잊고 떠나간다. 그런데 때로는 예기치 않은 일도 일어난다. 벌컥 다시 문이 열렸다.
토너였다. 뛰어왔는지 벌써 숨차하던 토너는 나를 번쩍 집어들었다.
“분명히 너를 걸고 아저씨가 맹세했어. 돌아오겠다고. 돌아와서 청년이 된 나를 꼭 보겠다고. 인디언의 후예들은 약속을 꼭 지킨다고 했어. 그러니 그때까지 너도 나와 같이 있는 거야.”
이러면 나는 이제 토너의 의자가 되는 건가요. 어쨌든 우중충하고 두려운 연쇄 살인범의 집에서 이제야 제대로 벗어나게 되네요. 이제, 나는 또 어떻게 될까요.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최리아 기자 (서울길음초등학교 / 4학년)